살구꽃이 피었답니다.
"부르클린 식물원에 살구꽃이 피었대요!!"
아내의 달뜬 목소리가 봄소식을 알린 것은 지난 주의 어느 날이었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가
올 해 새로 피어난 꽃에 대한 환희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게다가 아내는 추위를 무척 탄다.
그러니 (살구)꽃소식으로 해서 추위의 끄트머리에 가까이 왔다는 가벼운 희망이
흥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그러나 2 월 초에 살구꽃이 피었다는 것은
애시당초 이치에 맞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꽃에 대해 무지해도
복숭아 꽃 살구 꽃은 적어도 3 월 말이나 되어야
비로소 얼굴을 내미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집 최고 존엄의 말씀에
토를 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교황청의 압력과 위협에 "지구가 돌지 않는다"고 증언했던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혼잣말로 했다는 그 유명한 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것은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황청의 권위는 멀리 있지만
아내의 권위는 바로 곁에서 내가 매일 겪고
견뎌야 할 그런 성질의 것이다.
"살구꽃이 미치지 않았으면 얼어죽을라고 피어났을까?
그러나 들떠 있는 존엄에게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묵묵부답.
최고 존엄의 전횡에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입을 닫고 있어야 하는 사실이 참으로 답답했다.
그리고 어제 꽁꽁 언 빙판 위에서 축구를 마치고
돌아 온 나에게 꽃구경 가자고 하는 아내의 뺨은
이미 살구꽃 물이 들어 있었다.
식물원은 일요일이었지만 한산했다.
우리는 벚꽃 정원을 지나
복숭아 꽃 살구 꽃이 있는 지역으로'발걸음을 옮겼는데
꽃은 커녕, 봄의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는
아무런 조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공원 안은 그야말로
'겨울 왕국'이었다.
복숭아 나무와 살구 나무가 있는 곳에는
분홍 빛 꽃은 커녕
어둔 색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개뿔, 살구 꽃은 무슨 살구 꽃?'
꽃이 핀 기쁨보다
꽃이 피지 않아서
느끼는 기쁨이나 쾌감이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었다.
'존엄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명제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에
나는 온 몸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짜릿해 짐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나의 자제력은 빛을 발했다.
묵묵부답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다.
아내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존엄의 말씀에 존엄성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겨울의 식물원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내 식물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내에는 난과 열대식물이 생기 있게 꽃을 피우고 있었고,
한 켠의 방에는 분재 식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거의 모든 분재 식물도
제 빛을 잃고
칙칙한 빛을 띄고 있었는데
오직 한 그루 매화 꽃이 붉은 빛을 띈 채 그 방 안을 한희 밝히고 있었다.
아내는 누군가가 facebook에 그 매화 꽃 분재 사진을 올린 것을 보고
살구 꽃이 피었다고 단정을 지은 것이었다.
매화 꽃의 영어 이름 중 하나가 'Apricot'인데
그 말을 번역하면 살구가 되니
번역과 번역 사이를 오락가락 하며
매화 꽃이 살구 꽃으로
기묘한 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할 말이 생겼다.
그러니 살구꽃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잔망스럽지 않게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몰랐다.
이런 지혜는 살아가면서 경험으로 쌓인 것이다.
매화꽃이어도 좋고
살구 꽃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살구 꽃이 되었든, 매화 꽃이 되었든,
해석 상의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그 무엇이라도 좋을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고서는
아내의 말이 틀렸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항상 옳으신 분이시라는 걸
어제 일에서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다시금 결심한다.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나는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며
양치기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순한 양'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에 또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 분은 언제나 옳으시기 때문이다.
매화 분재
식물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 브런치로
스테이크 비빔밥을 먹었는데 음식 평가에 인색한 내가 엄지척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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