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일기 2
-나 지금 떨고 있니?(미국판 세한도)-
한파 예보에 몸과 마음이 쪼그라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보병학교 시절 악명 높은 유격훈련 하루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은근한 두려움이 나의 몸과 마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 아침 일어나서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 바깥 온도였다.
화씨 3 도
섭씨로 계산하면 영하 16 도보다 조금 더 내려간 수치다.
바람을 감안한 체감 온도는 아마 더 추울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더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속에 옷을 더 껴 입어 말아?-
보일러를 작동시키면 아무리 밖이 추워도
세탁소 안은 실내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가게 문이 여닫힐 때마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찬 공기는
인정 사정 보지 않고 내 아랫도리에 얼을 물을 뿌려대는 것 같으니 말이다.
보일러의 열기는 내가 서 있는 카운터로부터
뒷 쪽으로 10 미터도 더 떨어져 있는
프레스머신까지만 미치기에
직접적으로 열의 성은을 누릴 수 없으니
추운 겨울에는 나는 세탁소 안의 오지에서 일하는 것과 같다.
요사이 세탁소의 철문을 열고 닫을 때
쪼그리고 앉아 자물쇠를 채우고 열면서
바지를 통해 느껴지는 냉기가 아주 오싹할 정도이다.
그 오싹한 기억 때문에
오늘 아침 옷을 입을 때
내복인지 잠옷인지 구분이 모호한
바지 하나를 속에 껴 입었다.
아주 망설임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종아리에 느껴질 싸늘한 감촉이 두려워
더 생각하지 않고 얇은 바지 하나를 더 내 몸에 걸친 것이었다.
나는 평생 내가 스스로 내복을 사서 입은 적이 없다.
3 년 전인가 1 월에 노르웨이로 여행을 갈 때
아내가 내복을 사다 주어서
북극에 가까이 있는 노르웨이 여행 중에 내복을 입은 기억은 있어도
그 때를 제외하고 따로 내복을 입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내복을 입지 않고 추위를 견디는 게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의 필요충분 조건이 될 리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만은 손에든 고돌이 패 같아서
함부로 버리기 아까운 자존심의 한 부분을 지금까지 채워주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세탁소 문을 열면서
종아리에 느껴지는 차가움이
여제 느꼈던 차가움의 10 분의 1 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옷을 한 겹 더 껴입은 것은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의 탁월한 선택에 대한 만족감 때문에
배시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그 만족감을 여유 있게 즐긴 것은
그 때 뿐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실내는 어제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따뜻한 공기가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후회가 밀물처럼 빠른 속도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 순간만 참았으면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내 안의 명분과 실리가 충돌하면서
추위를 피하려는 실리적 선택은
필연적으로 내복 없이 추위를 견뎌 이겨내려는
내 자존심을 버릴 수 밖에 만들었다.
만일 내일도 오늘 아침처럼 춥다면
내복을
"입을 것인가, 입지 않을 것인가?"
라는 제법 심각한 실존적 고민을 하겠지만
아마도 '입을 것'에 무게를 더 둘 것 같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나의 자존심이
추위를 몰아 낼 힘을 많이 잃어버린 것 같다.
-자존심과 눈 앞의 실리 앞에서
쭈삣쭈삣 실리를 택하는 오늘 아침의 내가
내일부터는 자존심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고
아주 당연하게 실리를 택하면 어쩌지?-
자존심은 던져두고 실리만을 추구하는'
속물스런 꼰대'의 반열에 자연스레 오르게 된 것 같아
제법 비장하게 슬픈 기분이 들었다.
예전엔 그랬다.
내 동년배나 어린 사람들이 별로 춥지도 않은 날씨(?)에
내복을 입으면 지나치지 않고 한 마디 했다.
"이런 온화한 날씨에 웬 내복?"
은근히 내복을 입지 않은 나의 자존심을 세우며
살짝 상대방을 내 눈 아래에 두곤 했다.
이젠 알겠다.
내복 입는 사람들의 심정과 처지를.
꼰대가 될 때 되더라도
내복을 입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그런 꼰대가 되어야 겠다고
어느새 꼰대가 된 슬픈 나를 스스로 위로해 본다.
앞으로는 별로 춥지 않은 날에
내복을 입은 사람을 보더라도
"그 내복 따뜻하냐?"고
따뜻하게 물어 볼 줄 아는
마음 따뜻한 꼰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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