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이현주 시인의<밥 먹는 자식에게>
벌써 10 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플러싱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아이들 재잘거림을 반찬 삼아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맛난 식사를 하는데 웬 여자가 제 옆에 오더니
자기를 알아 보겠냐고 물었습니다.
안면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어디서 보았는지 영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나에겐 안면 인식 장애 같은 것이 있어서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눈썰미가 많이 부족합니다.
내가 머뭇거리는 눈치를 보이자
그 여인이 더 참지 못하고
“저 혜성이예요, 문혜성”하며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혜성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엉켰던 기억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을 때,
교복을 입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하얀 얼굴에 교복의 칼라가 늘 청결했던 그녀는
교단에서 바라보면 교실 ¾ 쯤 되는 곳에 자리가 있었기에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첫 시선이 그녀를 향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 머리모양을 늘 교칙을 어기며
살짝 말아 올려 멋을 부린 채로 등교하던 그 제자도
중년의 문턱으로 한 발을 살짝 디민 나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그저 평범하다고 밖엔 할 수 없던 그 머리 모양새가
그 때는 불량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을 때의 일입니다..
혜성이는 “제가 선생님 속 참 많이 썩혀 드렸죠?”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사흘 후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며
저희 가족이 먹은 밥값을 내 주었습니다.
사춘기 여자 고등학생의 마음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 한 채,
그저 교칙만을 강조했던,
스승이라 하기에는 함량이 너무 모자랐던 그 당시의 내 자신을 회상하며
잠깐 동안이지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여학교의 인기 있는 선생이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참 스승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도 그만인 것을
그 제자는 밥값도 제대로 못한 부족한 스승인 나를 일부러 찾아와
인사도 하고 밥값까지 대신 내주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하는 일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목숨을 지니고 밥값을 하는 일임을
그 제자는 옛 스승에게 깨우쳐 주고는
미처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총총히 떠났습니다.
모를 심고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해서
한 톨의 쌀이 밥이 되어 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여든 몇 번의 과정을 거친다지요?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단함으로
쌀을 수확했을 것이며
그것을 옮기고 밥을 지어 상에 올리는 이들의 수고로움까지
생각이 미치면 차마 밥 숟가락을 들 수가 없습니다.
사실 농사를 짓지 않고,
밥을 하지도 않으면서
꼬박꼬박 끼니를 거르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눈물 나도록 고마운 기적 같은 일인 것 같습니다.
한 그릇의 밥이 식탁에 오르기 까지
정말 여러 사람의 땀과 노력이 모아집니다.
그래서 한 그릇의 밥은 거룩하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밥이 하늘’이라고 그랬다지요?
삼 십 오 년 동안이나 나와 가족들을 위해
싫다 않고 밥을 지은 아내와
논에서부터 우리 집에 오기까지 거쳤을
많은 손길들에게 감사하며
밥값 제대로 하며 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올 해 결심은 그래서
밥 먹을 때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키는 걸로 정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감사의 역량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결정된다."
올 한해는 더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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