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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바람-------맞다

바람--------맞다


"바람이 그리워서---", 

아니면

"바람 맞으러----" 


라고 말을 해야 할까?


아침에 뉴저지로 축구를 하러 갔다 와서

아내에게 바다에 가자고 말을 꺼내며

혹시 왜 그러느냐고 물을 경우에 꺼내 놓을 예상 답안이었다.


그러나 삶 자체가 부조리인데 바다에 가는 일에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유야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을----


'빈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라고 했던가,

다섯 아이들이 집 안에서 북적일 때는 몰랐는데

하나 둘 떠나가고, 

내 손길 닿을 일이 별로 없어진 요즈음

가끔씩 답답하고 허무한 생각이 든다.


더구나 세탁소 일마저 내 손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1월 2 월이면

이 증세는 더 심해 진다.


젊은 시절,

아주 자주 바람 많은 길목에, 

그리고 언덕에 자주 발걸음을 했다.

스치는 바람결에 긴머리가 얼굴을 간지르고,

목덜미를 더듬으면

난 비로소 내 실존을 느끼기 시작했다.

죽었던 세포들이 꿈틀거리며 일어나

스물거림을 느꼈다.


그래서 내 머리카락의 길이는 길어서 목을 덮어야만 했다.

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은

바람을 느끼기 위한 안테나 구실을 했다.


삶의 환희라고 불러도 좋을 성질의 것이었다,

바람을 맞는 일은----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


폴 발레리의 그 유명한 시, 

'해변의 묘지'에 등장하는

그 구절과 만나기 한참 전에

나는 벌써 내 노트에 그렇게 써 놓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바람을 껴안고 

내 젊은 날들을 위로하며 살았다.


나 죽으면 

내 시신은 풍장을 하면 좋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죽음과 한참 떨어져 있던 20대부터였다.

바람은 내 생명의 시작이고

삶의 소실점이라면 더할 바 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바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바다로 가자고 한 것은.


참 오랫 동안 바람과 이별하며 살아왔다.

아니 외면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간 곳은 Jones Beach였다.

바닷가 주차장에는 차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차뿐이 아니었다.


차 안의 사람들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안의 사람들은 얼핏 보아도 70이 넘은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무심하게 바다를 보고,

부부끼리 잡담을 주고 받기도 했으며

우리 옆에 주차를 한 할머니는 낮잠을 잤다.

그러다 깨어나서는 전화기를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누워 낮잠 속으로 빨려 들었다.


흐르는 시간을 잊기 위해서 그 곳에 온 것 같았다.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


그것은 곧 죽음이다.

살아서 죽은 삶을 사는 일이다.


젊은이 몇은 모래바람을 가르고 바닷가로 나가서

산책을 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는 차 안의 의자를 뒤로 제치고 눈을 감았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가까이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렸는데

차가 가볍게 흔들리기도 했다.


눈을 뜨고 밖으로 나와 주차장 근처에서 사진 두어 장을 찍었다.


눈이며 코로 사정없이 모래바람이 들이쳤다.

차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머리 속에 모래가 만져졌다.

잠깐 동안에 머리 안이 모래로 붐볐다.

머리 안의 모래를 털어내고

스웨터의 모래도 턴 후에 외투를 챙겨 입고 아내와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정 없이 부는 모래 바람을 거슬러 파도가 성을 내는 바닷가에 이르니

바람은 불어도 모래가 날리지는 않았다.


드디어 모래가 섞이지 않은

맑은 바람을 만났다.


한동안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유행을 했다.

나는 살짝 말을 바꾸어 보았다.


"바람 맞으니 청춘이다."


영상의 기온이었지만

바다 바람은 거칠고 사납게 추웠다.

파도따라 걷다 보니 나중엔 머리가 띵하게 아팠다.

추위 때문에 몸이 움츠러 든 까닭이다.


그래도 바람을 맞은 덕에

시간의 수면 아래로 가라 앉던

나의 영혼이 중력을 거슬러 

위로 솟구치는 환희를 맛 볼 수 있었다.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바람을 맞느냐 피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바다를 향해 차를 세우고

유리창은 꼭꼭 닫은 채

따스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의 시간은 살아서 흐르는 것일까?


무풍지대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바람을 맞을 것인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던 햄릿처럼

나도 바람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피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그것은 죽은 삶의 살 것인가,

아니면 살아 쉼 쉬는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점점 온실 속의 안락함이 나를 유혹하는

경계에 서 있다.


겨울이 다 가기 전,

어느 바람 부는 날에

나는 Piermont의 갈대 속을 걸으리라.

갈대에 서걱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내 삶의 마지막까지

바람 맞으며 살겠다는서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내 삶을 지탱해준 마약 같은 존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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