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 겨울산책
토요일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는 비가 밤 새 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일요일 하루 종일 쉬임 없이 내릴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결국 일요일 아침 축구를 포기했다.
올 해는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동안
제대로 된 잔디 위에서 축구를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 까닭이다.
토요일 저녁, 잠자리에 들며 마음 속으로 축구를 포기했다.
일요일 아침에
축구를 하지 않으면
다섯 시간 정도의 여분 시간이 주어진다.
아내는 눈을 뜨자 빗 속으로 산책을 나가자고 조른다.
(다 내 건강을 위해서라고 권유를 하는 것인데 명령이라고 들리는 건 왜 그럴까?)
따로 아파트 안에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High Land Park.
이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주어졌을 것이다.
수도가 보급되기 전에
이 지역에 물을 공급하던 저수지가 있었던 곳이다.
숲이 아름답게 우거져 걷기도 좋을 뿐 아니라
자전거 전용 도로도 있으며.
테니스 코트와 야구장도 있어서
날 좋은 주말엔 파킹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까닭으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그런데 비가 내리니
일요일이라도 한적하기 그지 없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산책을 시작했다.
숲 속엔 옷을 벗은 나무들 사이에
콩알만한 빨간 열매가 달린 덩쿨이 있었는데
빗방울이 함께 달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 열매를 보면서
가지를 꺾어다 집 안에 크리스 마스 장식을 할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간 걷다가
길 가에 일종의 가지 치기를 당한
빨간 열매의 덩쿨이 널려 있는 걸 목격하는 순간
아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는데
나는 속으로 지르는 그 환호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낫이나 칼로 그 덩쿨을 자르면 자연을 훼손하는 해위일 것이나
길에 버려진 것을 줍는 것은
그 모든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혜택이 제공도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중의 아침 산책은 거기서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아내는 아침 산책도 하고
전리품까지 획득해서
일석이조를 한 기쁨에 들떠 있었다.
빗방울은 떨어지는데
그녀의 마음은 빗방울을 거슬러 하늘로 날아 올랐다.
처음에 계획했던 산책이나 잘 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깔끔하고 좋을까만은
그녀와 함께 하는 삶의 행로는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그 열매의 빨간 덩굴을 끌기도 하고 들기도 해서
차까지 옮기는 수고를 해야 했다.
별난 아내를 모시느라
다른 남편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이런 종류의 유별난 일을
과외로 해야 하는 신세 한탄이 나오는 건 이런 때이다.
부부유별이라는 말이
아내가 하는 일에 남편을 끼워넣지 말라는 뜻이라면
난 주저없이 그 말의 신봉자와 더불어 열렬한 추종자가 될 것이다.
아내는 그 빨간 열매를 가지고
크리스 마스 트리에 장식으로 매달았다.
거기까지는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급기야 아내는 장식용 화병에
빨간 열매의 덩쿨을 꽂아 이리저리 엮더니
우리 식구의 가족사진을 장식해 놓는 것이 아닌가?
그 단순한 재료를 가지고
짧은 시간 동안 멋들어진 장식을 하고
청소까지 혼자 마치고 난 아내에게
하지 말았어야 할, 그러나 결정적인
딱 한 마디를 거들었다.
"그렇게 해 놓으니 멋지네.당신은 예술가의 손, 아니 신의 손을 가지고 태어났어!"
한 마디로 립 서비스였지만 진실한 내 마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놈의 립 서비스가 지금까지도 문제였고,
앞으로도 나를 운명처럼 옥죌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아내는 나에게 별난 요청(?)을 당연하다는 듯이 할 것이고
머뭇거리는 나에게
"당신이 돈도 안 들이고 예쁘게 잘 한다고 했잖아."하며
과거의 내 발언을 소환해서
다시 그런 종류의 서비스를 강요할 것이다.
내 입단속을 스스로 잘 해야 함에도
아내의 솜씨를 보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의 일까지 해내니
감탄을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내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할 수 있는
부부유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얼마나 멀고 험난한 길을 가야 하나하고
비 그치지 않는 일요일 한탄 아닌 한탄을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