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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그 애비에 그 아드님 (Like father, like SON)

그 애비에 그 아드님 (Like father, like SON)





우리 집 다섯 아이들 중,

준기는 서열 4위이자 큰 아들이다.

위로 내리 딸 셋을 낳고

생긴 아이가 큰 아들 준기였다.


준기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의도가 성공(?)했다는 치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으나,

사실은 우리 부부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100% 우연이었다.


준기 위에 태어난 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덜컥 생긴 아들 때문에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선 것이 사실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걱정이 앞선 것은

막내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그렇겠지만

미국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려면

부모의 정성 뿐 아니라 

간과 돈의 투자가 어마무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8 년 차 이민자였던 내 어깨위에

첫 아들의 탄생은 

기쁨보다는 걱정거리 하나가 더 얹히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들 태어날 때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고

요즈음에는 아이들에게 고백을 하는데

아이들은 놀라움과 경악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해하려는 마음을 품으면서 말이다.


누군가가 득남의 인사를 건네면

가톨릭 신자인 우리 부부는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았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아이들 키울 걱정 때문에 기쁨과 축복은 

먼 후일로 미루어 두어야 했다.


준기는 아주 평범하게 자랐다.

딸 셋은 학교 성적도 훌륭해서 누구에게나 자랑의 대상이 되었으나

준기 이야기를 할 때면 '착하다'는 말 외에 별로 덧댈 말이 없었다.

흔히 누군가를 표현하거나 설명할 때

'착하다'는 말은 딱히 뛰어나거나 훌륭함이 결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준기는 정말 착했다.

그리고 그 착함은 우리 부부 뿐 아니라

친구와 이웃에게도 기쁨이 되었다.


준기는 그런 아이였다.


대학 시절 준기가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을 때였다.


축구를 마치고 집에 돌아 와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르는데 허벅지 뒷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층계를 오르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식은 땀이 날 정도였다.

샤워를 하며 몸을 거울에 비추어 보니

허벅지 뒤 쪽으로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이럴 경우 아내에게 이실직고를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당장 축구를 그만 두라!"는

선고가 떨어질 것은  

경험으로 미루어 눈 앞에 불을 보듯 뻔했다.

조기 은퇴의 불명예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삶의 기쁨 중 하나인 

축구와의 이별을 피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래서 고작 생각해 낸 것이 파스를 사다 통증 부위에 붙이는 일이었다.

한국에 살 때 어디 아프면 신신파스나 대일 파스를 붙이면

그 아픔이 사라지던 신화 같은 일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동네에 있는 한국 식품점에 들려 파스를 샀는데

예전에 내가 알던 신신파스보다 그 크기가 서너 배는 되어 보였다.


'HOT"과 'MILD' 두 종류가 있었는데

"MILD'를 선택했다.

효과가 조금 덜 할지라도 강한 냄새 때문에

개띠 아내가 가진, 

코에 버금가는 후각 능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파스를 사 들고 집에 돌아와 

나는 침대에 엎드려 은밀하게 준기에게 일렀다.

이런 일은 딸들에게 부탁할 수 없는 일이고

더군다나 아내에게 부탁해서는 더더욱 아니 될 일이었다.

아들을 키운 보람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Between You and Me"라는 비밀 공유자들끼리 쓰는 말까지 사용하며

아들과 아빠는 아주 끈끈한 유대감을 굥유한 공범자가 되었다.


"설명서 잘 읽어보고 여기다 잘 붙여봐."하며

통증이 있는 부위를 가리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준기가 한글을 잘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지나친 것이었다.

노안 때문에 내 눈이 신통치 않은 데다가

설명서를 꼼꼼히 읽을 정도의 성실성이 내겐 부족해서

그냥 준기에게 모든 걸 떠 맡긴 게 탈이라면 탈이었다.

옛날 파스는 그냥 셀로판에서 파스를 떼어내 아픈 곳에 붙이면 되었는데

요즈음 것은 파스와 접착판이 분리되어 있었다.


준기가 설명서를 읽지 않은 건 거의 확실하다.

쉬운 글이라면 떠듬떠듬 읽을 텐데

그런 설명서의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해서 준기는 파스를 내 허벅지의 멍든 부분에 붙이는 데 성공했다.


"임무 완수 (Mission Completed)"


파스가 내 살갗에 달라 붙는 순간 차가운 느낌이 들었고

이어서 미지근한 느낌이 찾아 왔는데

그 느낌은 이전에 경험했던 파스의 뜨거운 맛과는 사뭇 달랐다.

그 어색하고 낯선 느낌이 이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파스가 담긴 봉투에 표시된 'MILD'가 

미지근함을 뜻할 수도 있다는 추론에 힘 입어

곧 통증이 가실 것이라는 안도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샤워를 하면서도 파스가 떨어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한 결과

일요일에 붙였던 파스를 

통증이 웬만큼 사라진 금요일에 떼었다.

일주일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파스를 떼는 순간 나는 경악했다.

파스의 약효가 나타나는 쪽에 셀로판이 본연의 모습 그대로 거기 있는 것이었다.

결국 파스를 붙인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셀로판을 붙인 채 그 긴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파스의 약효는 셀로판에 가로막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통증이 사라진 것은 '시간이 약이 겠지요.'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는 

자연의 이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빠가 빨리 통증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아들의 정성된 마음 때문이었을까?


뒷 일을 대충 아들에게 떠맡긴 아빠나

별 생각 없이 셀로판을 떼지도 않고 붙인 아들이나

도낀개낀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표현에 'Like son, like father'라는 말이 있다

한국말에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는 것과 같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를 닮아 대충 대충 일을 처리하는 아들을 보며

그럼에도 아들이 있어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 냈는데

그런 아들이 아빠를 배반한 사건이 일어났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준기가 

명문이라고 해도 누가 시비걸 일이 없는

George Town Law'에 입학을 한 것이 바로 그 사건(?)의 발단이다.

부모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에서 학장이 

그 학교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일주일에 64 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는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절망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기에

아이들에게도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다섯 아이 누구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학장의 말이 근심의 씨앗이 되어 마음 속에 자라기 시작했다.


비싼 등록금을 대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 준기가 무슨 수로 일주일에 64 시간을 책상을 벗하여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내 머리 속을 채웠다.

우리집 잔디를 깎을 때도 막내 민기는 끝까지 아빠를 도와 일을 하는데

쉽게 싫증을 내고 중간에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다른 딴 짓을 하던 준기가 아니던가?


그런 준기가

Law School  첫 해를 성공적으로 보냈다.

학점이 모두 'A'일 뿐 아니라 성적이 상위 5% 안이라고 했다.

아빠를 교무부장으로 두지 않았음에도

내 상상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성적을 낸 것이다.


아들에게 이런 배신감을 느끼긴 처음이었다.

나랑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던 아들의 배신은

나 뿐 아니라 식구 모두의 기쁨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스런 아들 딸이 아니라 사랑스런 아들 딸이 되라"는 말을 한다.


준기는 요사이  New York 주 변호사에 합격하고

Law School 첫 학년을 마치고 이미 채용된

로펌에 다니고 있다.


준기는 요즈음 우리 부부가 사는 부르클린의 아파트 

바로 아래 층에 살면서 직장에 다니는데 

아침마다 케일과 과일을 갈아 만든 스무디를 내게 건네주며

출근길에 오른다.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꼬박꼬박 전철 요금을 내듯,

아빠에게 스무디를 만들어 주는데

그것이 내 건강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직장에서 하는 일과 더불어

소외 계층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살겠다는 아들은

이 아빠를 배반해도 너무 멀리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이며

이웃을 품으려는 생각까지

이 아빠보다 여러모로 낫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그 애비에 그 아드님'이라고 한 것이다.

영어 제목도 아빠(father)는 소문자로, 아드님(SON)은 대문자로 쓴 까닭이다.


비 내리는 오늘 아침,

자기가 만든 스무디를 아빠에게 건네는 준기의 한 쪽 손엔 우산이,

그리고 다른 쪽 어깨에는 소박한 Sack이 메어져 있었다.


그 안에는 자기가 만든 점심과 아울러

직장에 출근하기 전 근처의 Gym에서 운동을 하기 위한

옷과 운동화가 들어 있을 것이다.


자기의 건강을 위해 운동도 거르지 않고 하는 준기는

가끔씩(아니 자주)  꾀를 부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다.


자랑스러운 데다가 

사랑스러운 아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빗소리와 함께

아들의 배신을 열렬히 기뻐하고 경하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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