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되밟기 - Big Meadows의 아침
감기 기운에다가 피로가 겹쳐서
전 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가 해뜨는 시간을 말해주었지만
내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 이유는 몸도 몸이거니와 일기예보 상으로는
간 밤에 비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맑은 햇살이 있어야 할 하늘에
낮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 있을 걸 생각하니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작은 방 안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마음을 추스리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나무들이 마구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나무들 사이로
먼 하늘에 붉은 빛이 신비롭게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비로서 멈추었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 아내를 재촉했다.
내가 아내를 재촉한 건 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주 살짝 밤새 눈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낯 선 산 속에서
생각하지도 못 했던 첫 눈을 보고
맨숭맨숭할 사람이 있을까?
축복처럼 밤새 눈이 내렸던 것이다.
우연이지만 그럴 때
우리는 축복처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인색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서둘러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View Point롤 향했다.
이미 해가 지평선 위로 떠 오르긴 했으나
구름 속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의 첫 햇살을 만나는 느낌은
언제나 새롭고 황홀하다.
그리고 베일 속 신부처럼 신비롭다.
아침 해가 떠서
구름 속에 머물고 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일출이 주는 환각에 빠지기 위해서는
Big Meadows에 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다시
차를 돌렸다.
햇살이
산 봉우리와 나무를 비집고
가는 길 위에 쏟아졌다.
붉고 황홀한 햇살이.
Big Meadows에 막 뜨는 해.
풀들도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살이 만든
빛,
빛깔들의 잔치.
풀밭 속
간 밤에 내린 눈의 흔적
그렇게 Big Meadows에도 아침이 왔다.
우리 부부와
또 한 사람이 아침 해를 만나기 위해 추위를와 동무하며
그 너른 풀밭에 서 있었다.
아침 시간 햇살이 풀밭에 내려 앉던
그 곳, 그 시간, 그 빛을
우리 세 사람만이
비밀스럽게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Lodge의 로비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너른 창 너머의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다.
창 틈으로 바람이 솔솔 스며 들었다.
겨울이 바람에 묻어 들어왔다.
벽난로의 장작불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곳 산장도 11 월이면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 소리에 공연히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무수한 트레킹 코스가 있긴 했으나
우리 몸 상태를 고려해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했다.
아직 반 쯤 남은 차의 개스를 채우기 위해
부러 안내소 옆의 주유소를 찾았다.
그런데 차는 있어도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 것이 아니가?
아무리 산 중이지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유가 끝났으면 빨리 차를 치워야지
차를 쥬유기 옆에 두고 10 분도 넘게 자리를 비우다니
매너가 없어도 이건 아주 분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아예 차를 거기 둔 채
안내소에 딸린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아니면 커피를 사들고 와서 차 안에서 동행끼리 시시닥거리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10 여 분 정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다
차 한 대가 주유를 마치고 나가길래
그 자리에서 나도 주유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스가 호스를 타고 차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속도가
내 상상을 벗어나고 말았다.
재어보지는 않았어도 1 갤런을 주유하는데 거의 2- 3 분이 걸렸다.
10 갤런 정도 주유를 위해서 거의 20-30 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유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돈을 쓰는 속도도 느리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차의 사람들이 차만 두고 사라진 채
자기 볼 일을 보고 느긋하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후사정을 알 길이 없었던 나는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이웃 차들의 주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증오의 말과 저주를 퍼부었다.
나도 주유를 시작하며
그 느린 속도를 감안해서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머리속에 떠오르는 일이 없어서
하릴없이 커피 한 잔을 마시기로 했다.
안내소 식당에서 커피 한 잔을 사 가지고 나왔는데
그 때까지도 주유 기계의 눈금은(엄밀히 말하자면 자판)
1 갤런을 조금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미 탱크가 다 채워지고
30 여 달러의 돈이 카드에서 빠져 나갔어야 할 시간이었다.
눈금은 5 달러 하고 몇 센트의 돈만을 기록하고 있었다.
돈 쓰는 데도 인내심이 필요한 곳이었다.
개스도 시간도,
거기서는 구름의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살면서 가던 길 잠시 멈추는일,
살아가며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서 개스를 넣지 않고 지나쳤으면
평생 몰랐던 사실.
욕을 퍼붓던 대상이었던 그 사람들과
내가 다르지 않고
그 사람들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섯 시간하고 얼마를 더 보태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아홉 시간이나 걸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감기 기운도 있고,
몸의 피로도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아홉 시간을 차에서 보내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읽었던 기사 한 토막이 생각났다.
영국의 어느 신문사에서 이벤트를 기획했는데
그 내용은 영국의 가장 외진 곳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모에 응모를 했는데
가장 기발한 방법으로 채택된 것이
'좋은 친구와 동행'이었다고 한다.
어떤 기술적이거나 아니면 물리적인 면에서
그 해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정서적, 심리적으로 해답에 접근한 것이 신선하고 또 신기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우리 부부의 결혼 36 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까지 36 년,
그리고 앞으로 얼마가 될 지는 몰라도
함께 가야 할 길, 그리고 그 시간.
우리 등 뒤의 길과 시간,
그리고 앞에 펼쳐질 길과 시간.
서로가 좋은 동행이 되기 위해
우리는 둘이서만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배가 고프면'그것이 비록 선악과일지라도
거침 없이 툭 따서
나에게 건네 줄 나의 동행 때문에
길에서 보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선악과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날 지라도
그래서 속세에서의 삶이 아무리 팍팍해도
좋은 동행과 함께 가는 길이
두렵지 않은 까닭이다.
Big Meadows의 아름다운 가을 색은
그대로 우리 마음에 옮겨 곱게 물이 들었다.
그 아름다운 가을빛을 기억하며
우리는 오늘도
또다른 일탈을 꿈꾸고 있는 중이다.
-작년 내 환갑, California Malibu에서-
'여행 이야기 > 미국 여기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Boston 1ㅣ 박 2 일 - Freedom Trail (0) | 2019.02.22 |
---|---|
Boston 1 박 2 일 - 조카 영진이 그리고 Union Oyster House (0) | 2019.01.26 |
추억 되밟기- Big Meadows (오후, 저녁) (0) | 2018.10.27 |
Watkins Glen State Park 2 - 낙수 (0) | 2018.07.18 |
Watkins Glen State Park (0) | 2018.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