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isters 뮤지엄을 나와
허드슨 강변 쪽의 길을 따라 북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아직은 숲이 우거졌고 여름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도
계절은 초가을을 건너 뛰고 깊은 가을 속에 이미 와 있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의 촉감이 그랬고,
나뭇잎 서걱이는 소리가 그랬다.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다 들이밀다를 반복하던 해는
이내 구름 속으로 몸을 감추고 말았다.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을씨년 기분이 들었다.
숲 속에 있는 가로등은 꺼지지 않고 켜져 있었는데
그 불빛을 내 눈이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구름은 전체적인 공원의 조도를
어둑어둑할 만큼 낮추어 주는 역할을 했다.
길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바위 옆에 난 오솔길의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를 수도 있고
아래 쪽으로 내려 갈 수도 있었다.
응달 속에 핀 꽃들이
생기를 잃고 빛깔도 쇠락해졌다.
그냥 발길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서부터인지 몰라도
여름 한 철을 쉬지 않고 기어 올라온
담쟁이 잎들이 벼랑 난간 위로 얼굴을 내 밀었다.
대부분 녹색이었지만
발그스레 물이 든 녀석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담쟁이에게는 기어 오르는 일이
삶의 하나 뿐인 목표이자 존재의 의미가 될 것이다.
담쟁이에게 기어 오르는 일이 삶이라면
내 삶에서 담쟁이 잎같이
무언가를 위해
온 몸의 뼈와 세포를 동원해서 지향했던 일이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아무러면 어떤가.
나는 여기,
이 가을 속에서
아직 숨 쉬고 있고
담쟁이 잎들과 눈 맞추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내 얼굴은
힘겹게 벼랑을 기어 올라 온
담쟁이의 그것보다 훨씬 붉어야 마땅할 것이나
그런 생각을 내려 놓으면
그냥 무심할 수 있는 것이다.
담쟁이 잎이 내가 아닌 것처럼
나도 담쟁이 잎이 아닌 것이다.
내 존재가 얼굴을 붏힐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자
나는 담쟁이 잎에서 눈을 떼고
갈 길을 계속 갔다.
머지 않아 길은 언덕을 돌아가며 이어져 있었다.
나는 언덕을 오르는 계단을 택했고
다시 박물관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박물관이 아니라
200- 300 미터를 더 걸어 오르면
오른 쪽으로 자리한 'New Leaf'란 식당을 향해서였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뉴저지까지 가서 축구를 하고
뮤지엄과 공원을 한 번도 앉거나 쉬지 않고 걸었으니
내 육신이 그 시장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였다.
식당 안의 빈 자리가 눈에 많이 띄었다.
예약 손님만 받느냐고 물었더니
편한 데 앉으라고 했다.
손님들에게 자리를 배정해 주는 이는
나이가 50은 넘은 것처럼 보였는데
구렛나루가 멋지게 난 흑인이었다.
몸에 잘 맞는 바지와 셔츠, 그리고 그 위에 조끼를 입었는데
무척 세련미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꽤 값이 나가는 중절모까지 쓴 태가
일보다는 자기 용태를 자랑하러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삐뚤어진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했다.
게다가 말투도 좀 건방지게 들렸는데
워낙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기 용모에 합당한 말투를 연구해서 그런 것인지
내가 알 도리는 없었다.
음식 가격?
물론 비싸다.
비싼 줄 알면서도 허세를 한 번 부린 것이다.
나도 그 정도의 허세를 부려도 좋을 만큼의 삶을 살았다고
애써 평가하며
그 때 만큼은 나에게 한 없이 너그러워졌다.
육즙이 많은 'New Leaf Burger'로 시장기를 해결하고 나니
몸에 다시 '새 잎'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잎은 지고 있어도 그 식당은 수십 년 동안
사시사철 'New Leaf'라는 이름을 고수하며
끄덕 없이 그 자리를 지켜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New Leaf'식당 주변엔 누렇게 마른 잎들이
바람에 서걱이고 있엇다.
나는 발길을 화원 쪽으로 돌렸다.
화원에도 가을 기운이 완연했다.
화려했던 꽃잎의 빛깔이 시들해졌다.
날도 흐리고 으슬으슬 바람이 불어왔다.
서둘러 화단을 떠나 정문쪽으로 향했다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정문 앞 써클 화단에 칸나가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이깟 날씨 쯤 하며 허세를 부리듯
바람에 큰 키가 살랑거리며 흔들어댔다.
내 발 길은 언젠가 이 곳에 왔다가
길을 잘 못 들어 지나갔던 경사 진 계단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멋진 사진이 나올 거라고
늘 마음 속에 담아두고 그리워 했던 곳이다.
계단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조지 워싱톤 다리 쪽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 가다
처음으로 왼 쪽으로 길이 나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얼마를 가다 보니 예의 그 계단이 보였다.
멋 진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별로 감흥이 일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마음에 두었던 여자 아이를
여동생 대학 졸업식 때 가서 만난 적이 있는데
내 상상 속에서만
그 여자 아이의 미모가 풍선처럼 부풀려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실망스러움과 함께 터진 풍선처럼
내 마음도 착 가라앉았던 기억이 났다.
볼품 없는 계단을 아무 감흥 없이
천천히 걸어 올랐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다리에 피곤이 몰려 왔다.
쉼이 필요했다.
쉼이 필요한 계절,
그 시간이 닥친 것이다.
계절도,
내 삶에도 가을이
온 것이다.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바람이 다시 내 몸을 감고 지나갔다.
축구장에 도착했을 때
황홀하게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아침이 황홀하다고 해서
그것이 주욱 이어지지 않는 삶의 아이러니.
축구 시작하며 하늘은 옅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박물관 입구가 보이는 곳에 주차.
가로등 옆에 숲길이 있다.
이런 숲길이
사방으로 나 있다.
바알갛게 익은
담쟁이 잎.
식당 안팎
공원 입구 바로 앞에 A 트레인 역이 있다.
계단 옆에 문이 있다
?
계단 오르다 만난 하수구?
조그만 이파리가 4각형 모양의 틀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잎들의 감옥 같다.
인근 동네 어느 건물의 문.
한 쪽만 심하게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쓰이고 쓰이지 않고-----
쓰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과
쓰이며 변하고 퇴색하는 것 사이의 분명한 차이.
계단 주위
가을 화단.
꽃을 찍으며 이렇게 맥이 빠진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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