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즈음에(2013)
'뚝'하는 퉁명스런 소리와 함께
유효기간이 지난 내 운전 면허증에 구멍이 난 것은
새 면허증이 프린터에서 나오는 순간과 거의 일치했다.
차량국 직원은 옛 면허증을 펀처 밑에 놓았다가
새로운 면허증이 프린트 되어 나오는 순간, 단 일 초를 허비함 없이
아주 숙달된 솜씨로 구멍을 내었다.
결과적으로 일 초의 오차도 없이 면허증의 영속성을 획득한 것이었다.
지난 5년이라는 세월이 펀처로 뚫린 구멍을 통해서
한 순간에 다 새어나가고 말았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월, 혹은 시간의 흔적이
겨울날 빠진 앞니처럼 시리게 작은 구멍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유효기간이 지난 면허증을
본인에게 새 면허증과 함께 돌려준다는 것이다.
누구나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이 번 만은 에외다.
그것도 옛 것이 훨씬 좋아서
아직도 새 면허증 뒤에 함께 가지고 다닌다.
이미 사라진 지난 5년 동안
참 젊고 준수한(?) 내가 운전을 하고 다녔다.
머리도 검고 얼굴엔 주름도 없는 잘 생긴 청년(?)이.
그런데 새로 발급 받은 면허증의 나는
머리 숱도 듬성듬성 속이 비치는 데다가
흰 머리가 검은 머리를 압도하고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얼굴엔 주름도 잡혀 있다.
가슴 한 쪽이 아렸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은
영락 없는 노인이다.
지난 5년이라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 얼굴에 묻어 있었다.
결혼 전 아내의 친구 하나는
나를 보고 '목욕탕에서 갓 나온 남자' 같다고 했다는데
그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디 가서 낮술이라도 들이키고 싶었다.
다시 젊은 날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그런 술이 있다면
마구 들이키고 싶었다.
옛 면허증과 새 면허증을 번갈아 보며
이런 헛된 망상에 빠져 있는데
지금까지는 면허증의 유효기간이 5년이던 것이
새 면허증은 4년인 것을 알게 되었다.
왜일까?
유효 기간 안에 죽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아니면 나이 들어가며 새 면허증을 받으며 느끼는
충격의 완화를 위햐여 차량국의 배려심 때문에?
어쨌거나 앞으로 4년,
이 면허증의 유효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면허증을 받을 때면
내 나이 예순 즈음이다.
아무래도 생일 전에 발급 받으니
딱 환갑은 아니고 예순 언저리에 가 있을 것이다.
환갑은 동양에서의 한 생이다.
하나의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에
주름이며 흰 머리카락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4년 후 새로운 운전 면허증을 받을 즈음이면
내 육신은 지금보다 좀 더 쇠락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면허증과 함께
나는 하늘이 주신 한 생을 마치고
또 하나의 아주 새로운 생을 살아갈 것이니,
몸은 비록 노쇠해질지언정
마음만은 한 살짜리 아기처럼
푸릇푸릇 아름다우리라는 다짐을
새로 받은 면허증을 바라보며
자못 비장하게 하고 또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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