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늦가을이었습니다.
아니 초겨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쌀쌀한 바람이
부는 오후였습니다.
Brooklyn의 Botanic Garden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습니다.
공원 입구를 지나면서 오른 쪽 언덕 위에
한 100 미터 쯤 될까?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그 오솔길 양 옆으로
은행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 길을 아주 천천히 걸었습니다.
아주 젊은 시절에
시를 쓴다고 긴 머리 나풀대며
이리저리 바람처럼 나다니던 시절의 기억이
시린 바람에 묻어왔습니다.
손에는 늘 시작노트가 들려 있었습니다.
생각 나는 대로 끄적거렸던
낙서 비슷한 글들이 노트 안에
낙엽처럼 무질서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지금은 기억나는 시 한편이 없으니
얼마나 형편이 없는 글이었을 지 짐작이 갑니다.
어느 늦가을
알고 지내던 여자 친구 하나가
내 시작 노트를 몰래 들춰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노트 한 귀퉁이에 적혀 있던
어느 시의 후기를 가리키며
자기는 그 구절이 너무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녀의 단발머리가
바람결에 찰랑거렸습니다.
아마도 "시를 한 편 쓰고 나면 남는 것은 늘
사과처럼 빨간 부끄럼 하나."라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오솔길을 걷는데
그 여자아이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혹시 그 아이가 날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한 소절도 채 마치지 못했는데
훌쩍 지나쳤던 30년 전의 가을 바람이
속절없이 불어왔습니다.
시린 바람이 입 안으로 한 웅큼 들어왔습니다.
그 바람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그 중 몇은 이미 반이 넘게 세어버린 내 머리를
스치며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오늘은 그녀가 낮 달로 떠 있습니다.
아! 살아가는 일의 소슬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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