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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내 마음에 드는)

세탁소에서 생긴 일 - 내 두 팔은 길이가 같을까?

세탁소에서 생긴 일 - 내 두 팔은 길이가 같을까?

 

"이 슈트 내 몸에 맞게 잘 좀 고쳐 주세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장한 남자 손님이 

가먼트 백(garment bag)에서

양복 두 벌을 꺼내는 순간

긴장감 때문에 내 마음속에 살짝 그늘이 스쳤다.

 

세탁소 생활이 이십 년을 넘어 삼십 년 가까이 되다 보니

옷을 보면 그 옷이 어떤 수준의 옷인지는

대충 느낌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눈에 레이블을 보지 않아도

이 동네에서는 보기 어려운 고급 양복이었다.

손으로 만져 보니 그 느낌에 확신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고급 양복을 보고 내가 긴장하는 것은

우리 세탁소에서 옷 고치는 일을 하는 아가씨(처음엔 아가씨였는데 지금은 아줌마가 더 어울릴 것 같다)

가끔씩 실수를 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옷을 잘 못 고쳤다간

큰 낭패를 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밥 한 그릇 얻어먹으려다

쌀 한 가마니 져다 주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손님에게 옷을 입어보라고 했다.

 

잠시 후에 탈의실에서 새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손님의

모양새를 보니

양복의 팔 길이와 바지 길이만 줄이면

완벽할 것 같았다.

 

바지의 밑 단에 핀을 꼽고

양복의 오른쪽.

 

손님은 바지 길이엔 만족하면서도

소매 길이는 "조금 올려라, 낮춰라 "하며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몇 번을 양복 소매를 

마음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더니

자기도 너무하다 싶었는지

결정을 내렸다.

 

이런 손님은 대체로 1 mm에 목숨을 거는 부류에 속하기에

차라리 밥 한 끼 굶는 것이

배는 고파도 마음은 편한 경우다.

두고두고 까탈을 부리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는 데 소질이 없는 나는

참을성까지도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런 경우를 만나면 짜증이 나는 건 기본이고

미국에 와서 이러고 있는 내가 한심하고 비참해지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그 손님이 지정하는 곳에 핀을 꽂았다.

핀을 꽂을 때 하마터면

그 핀으로 내 왼쪽 손가락을 찌를 뻔했다..

 

보병학교 시절 소대 전투 훈련을 할 때

경사진 산을 수십 번 굴러 떨어지며

고지를 점령할 때도

힘은 들었어도 그렇게 마음고생 한 기억은 없었다.

 

거의 20 년 만에 처음 산 양복이라고 하며

딸의 결혼식 때 입어야 하니 '잘 부탁한다'라고 했다.

좋은 일을 맞이하는 그 손님에게 짜증 가득한 내 마음을

가식적인 미소로 위장을 했다.

(내가 가식적인 웃음을 지을 정도로 이민 생활이 녹록지 않다.)

 

"! 축하드립니다."

 

다음 날 출근한 로사(옷 수선하는 아가씨)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흔히 사극에서 계략을 꾸미는 대왕대비 마마가 하는 대사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라고

아주 비장하고 강한 어조로 일렀다.

 

로사는 내가 강조한 대로 나름 신경을 써서 일을 끝냈다.

 

자로 재어 보니 재킷의 양 쪽 팔 길이며

바지의 길이가 정확하고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수선이 끝난 양복을 잘 다려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이럴 땐 세탁소를 하면서 보람이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틀 후에 나타난 손님은

옷을 입어 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손님을 보는 순간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뜨끔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밥 한 그릇 때문에 쌀 한 가마니 갖다 바쳐야 하는

경우를 만난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바지 길이는 딱 맞는데

재킷의 소매 길이가 다른 것이 아닌가?

 

분명 작업이 끝난 재킷의 팔 길이를 재어서

확인까지 마쳤는데-----

 

총 맞은 것처럼 마구 흐트러진 정신을 주어 모아

세심하게 손님과 옷을 살폈다.

 

두 팔의 길이가 확연히 달랐다.

 

낭패도 그런 낭패가 있을 수 없었다.

 

다시 재킷의 팔 길이를 세심하게 재 보았다.

오차 없이 똑같았다.

 

결국 다른 것은 손님의 팔 길이었다.

오른쪽 팔이 왼쪽 팔보다 1인치가 더 길었다.

 

나의 영민한 두뇌가 빠르게 추리를 시작했다.

 

"오른 손잡이 맞으시죠?"

""

 

"혹시 야구를 하셨나요?"

"이십여 년 했습니다."

 

스스로 나의 추리력에 감탄을 했다.

 

학교 다닐 때 생물 시간에 배웠던

'라마르크' '용불용설' 같은 단어가

40 년도 넘게 내 기억의 창고에 묻혀 있다가 기어 나와

머릿속을 뜬금없이 스쳐 지나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오른쪽 팔 길이를 재었던 까닭으로

왼쪽 소매만 1 인치 줄이면 되니

귀찮긴 해도 쌀 한 가마니 물어 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의 왼쪽 팔을 늘일 순 없어도

소매를 줄일 수 있음은 내겐 축복이었다.

(내가 무슨 선행을 했나 생각 중이다.)

 

다시 소매를 1 인치 줄여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고

결국 그 손님은 슈트 안에 입을 셔츠를 입고 와서

다시 슈트를 입어 보려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탈의실 밖으로 나타난 손님의 재킷 소매 사이로

셔츠의 소매가 고개를 내밀었는데

그 길이가 달랐다.

 

기형.

 

피식하고 방귀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주 잠시 당황했지만

이 번에 확신이 있었다.

 

불평을 터뜨리려는 손님의 입에 앞서

내 입이 먼저 격발을 했다.

 

"이제 문제는

당신의 팔도 아니고

양복의 소매 길이는 더더욱 아니고

바로 당신이 입은 셔츠의 팔 길이예요."

 

"You got it?"(이해하시겠어요?)

라고 마지막 말을 던질 때의 내 말에는

빳빳한 풀기가 묻어 있었다.

 

우리 세탁소 손님 중에는

다리의 길이가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걸음걸이로 확연하게 알 수 있으므로

바지 길이를 줄이기 전에

양 쪽의 길이를 다 잰다.

그런 손님은 대개 미리 다리 길이가 다름을 내게 알려 준다.

 

내게 양복 수선을 맡긴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팔의 길이가 길어졌을 것이다.

스스로는 자기 팔의 길이가 다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가 옷소매를 잘 못 줄인 것이라고

처음엔 콘크리트처럼 굳건하게 믿었을 것이다.

 

무심하게 살다 보면

그 손님처럼 팔 길이가 늘어나는 걸 인지하지 못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내 팔 길이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스스로의 믿음, 혹은 신념 같은 것이

콘크리트처럼 굳어질 때이다.

 

그릇된 신념이나 믿음은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이지만

히틀러와 나치처럼 집단적으로 어마어마한 비극을 부르기도 한다.

 

오늘 아침 내 마음의 팔 길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변하지 않았는지를 반성하며

두 팔을 가지런히 앞으로 뻗어

대어 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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