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축복
내가 뉴욕에 첫 발을 내디딘 1984년도의 3월은
봄이 오기는커녕,
아예 겨울이 그 시간을 점령하고는 떠나지 않은 채 횡포를 부렸습니다.
혹심한 추위로 잔뜩움츠리고 눈이 무릎까지 쌓인 뉴욕의 3월 속으로
나는 한국으로부터 날아왔고,
그 속에서 민들레 씨와 같은 나의 이민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날씨부터 나의 이민 생활의 전주곡을 연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 뉴욕의 한국 이민자들은 대부분이
야채 가게나 생선 가게, 혹은 세탁소와 잡화가게 같은 자영업을 하거나,
혹은 그런 업소의 종업원으로 몸으로 때우며 고단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뉴욕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브루클린에 있는 야채가게로 출근을 하였습니다.
하루 열두 시간 이상을 일터에서 보냈는데,
이런 일을 해 본 경험이 없는데다가
손으로 하는 일이 그제나 이제나 영 서툴기만 한 나를 바라보는
매니저의 눈길이 곱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도저히 구제불능이라는 표정을 짓곤 했는데,
그때마다 심한 모욕감과 아울러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일은 일대로 그렇게 고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일이 서투르고 손에 익지 않아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야채와 과일을 다듬고
또 그 박스들이며 쓰레기들을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휘익하고 바람 스치듯 지나갔습니다.
손에 물이 마를 새가 없어서인지
손가락 마디가 갈라지고 피가 맺혔습니다.
밤이 되면 손을 오므릴 수도 펼 수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더운물에담근 채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래도 몸이 고단한 건 견딜 수 있었는데,
문제는 매니저가 한 마디씩 툭툭 던질 때마다,
손마디가 갈라져서 아픈 것보다 더 쓰라린 생채기가
마음속에 그 숫자와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나보다 여러 모로 부족한 사람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자존심 강한 내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이런 사람과 만날 기회도 별로 없었을 텐데,
미국에 이민 와서 생각하지도 못한 마음고생을 하게 된 것 같아
이민을 가자고 한 아내가 원망스러웠고,
“미국에 가면 혹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별생각 없이 미국까지 따라온 내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습니다.
어느날 매니저가 “아니 이 따위로 일을 하고 어떻게 주급을 받아?”라고 하는 말에
머릿속에 수 백 개의 바늘이 감춰져 있다가
일제히 내 머리를 찔러대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미국에까지 와서 이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한 가닥 오기 같은 것이 스물거리며 똬리를 트는 것 같았습니다.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마음가짐부터 달라져야 하리라는 결심 같은 것도 그때 한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일이 끝난 후, 평소엔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 하지 않던
마지막 쓰레기 정리를 스스로 청했습니다.
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뒷짐만 지고 남에게 미루던 일이었습니다.
끝내는 쓰레기 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썩은 과일과 야채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견디며 쓰레기를 발로 다졌습니다.
무슨 훈장이라도 되듯이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내 모습도
쓰레기와 함께 발로 밟았습니다.
군대에서는 유능한 초급 장교였고,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인기 있던 여고 교사였던 나를
쓰레기통 속에 버렸습니다.
처음에 마음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쓰레기 통 안에 들어가니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평화로울 수 없었습니다.
더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낮게 내려간 곳,
바로 쓰레기 통 안에서 나는 그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허영기 넘치는 자존심을 버리고
뉴욕의 야채가게 종업원으로 다시 태어나던 그 순간,
매니저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를 보았습니다.
그 후로 매니저는 성심껏 내게 일을 가르쳐 주었고,
나 자신도 능숙하고 유능한 ‘야돌이’가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은 허리 아픈 이민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도 씩씩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눈 부신 여명을 맞기 위해서 밤의 어둠은 그만큼 더 깊어야 하는 것처럼---------
오늘도 3월의 꽃샘바람이 불어옵니다.
집 건너 편의 숲 속의 빈 나뭇가지는 이 3월에
겨울보다도 더 처절하게 아파하며 울어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꽃샘바람으로 해서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세차게 흔들리고,
또 그런 까닭으로 땅 속으로부터 물과 양분이 나무의 구석구석까지 잘 전달되어서
나무가 풍요롭게 잘 자란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저 야윈 나무가지엔 초록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 햇빛에 반짝반짝 윤이 나겠지요.
숲 속은 잎들로 빼곡하고 새들이 가지에 깃들 것입니다.
나무에게도 사람에게도
고통은 축복을 준비하는 서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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