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산행일기

한국에 올 계획을 세웠을 때

무디어진 내 감성을 나지막히 일렁이게 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읍니다.

그 하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독서모임이고

또 하나는 산행이었습니다.

독서 모임은 이미 지난 주에 다녀왔고

어제는 산행을 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 오면 머무르던 집이 경기도 광주에 있었는데

처음엔 친구들이 그 근방으로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가

며칠 전 인왕산으로 바꾸었습니다.


내가 인사동에 있는 호텔에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서는

내가 움직이기 편한 곳으로

부랴부랴 목적지를 바꾼 것입니다.


나이 들어 가면서 몸은 둔해져도

이렇게 마음을 보는 눈은 밝아지는 게 

나이 먹음의 축복이라면 축복입니다.

길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은 행복감으로 이미 부푼 상태였습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종로 3가 역까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서

전철을 타고 가느니 차라리 걷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가는 길에 있는 경복궁에도 잠깐이나마 들리기 위해

약속 시간 한 시간 반 전에 호텔을 출발했습니다.

아내에겐 인왕산 호랑이를 잡아오리라고

뻥을 쳤습니다.

인왕산 하면 떠오르는 게 '인왕산 호랑이' 뿐이어서 그랬습니다.


날씨는 추웠습니다.

목도리 사이로 겨울의 찬 기운이 비집고 들어오기도 하고

머리에 쓴 모자를 날려 버릴 듯 바람이 불기도 했습니다.

예전 내가 살던 서울의 겨울은 아직 거기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직 기 죽지 않은 겨울의 기세가 반가웠습니다.


아직 손님을 맞을 채비가 덜 된 경복궁 안으로 발을 디 밀었습니다.

직원들은 궁궐 지키는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이리저리 마치 업소에서 가게 문 여는 준비를 하는 것처럼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습니다.


그 이른 시간에

그것도 칼바람이 부는 겨울 아침에

경복궁을 거니는 한국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서양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근정전까지 가기 위해서는 광화문을 지나

문을 또 하나 통과해야 했는데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매표소에서 키 큰 백인 청년을 하나 만났는데

'Jetblue' 항공사의 파일럿트라고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뉴저지 출신이고

일 년 전 보스톤으로 거처를 옯겨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한 이틀 머무는 동안 짬을 내어

서울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 위해서

일찍부터 부산을 떠는 걸 보니

참 부지런하고 반듯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30 여분 간 그 젊은이와 

경복궁을 천천히 걸어 다녔습니다.

근정전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지금처럼 추운 겨울엔 어떻게 회의를 했나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겨울에 풋볼 경기 관람하는 사람들처럼

이불을 걸치고 있었을 까?

내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더운 여름엔 웃통을 벗어 제치면 덜 더울 텐데 

체면이나 권위 때문에 그리할 수 없었던 왕들을 생각하면서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같으면 왕 한 번 해 보라고 하면

손사래를 적극적으로 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실제 그런 상황이 되면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장담하지 못 할 것 같기는 합니다.


궁궐 여기 저기를 걸으려 내 흥미를 당기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는데

음식을 장만하던 곳이었습니다.

건물 이름은 물론 잊었읍니다.

안과 밖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던 그 곳의 가운데 마당 쯤 되는 곳에

둥근 연자방아처럼 원통형 돌이 있었고

그 위에는 나무 덮개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우물이라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음식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물을

궁녀들이 이 곳에서 길어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청년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대답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맷돌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물이라고 답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Well'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내 바닥 얕은 영어실력의 초라함보다도

그 쉬운 단어조차 기억하지 못 하는 

뭐라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이 

순간 내 몸 전체를 전류처럼 흘렀습니다.


다행히 그 돌 반대 편에 안내 표지판이 있었는데

거기 영문으로 된 설명도 함께 있었고 'well'이라는 영문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we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답답하던 내 마음 속으로

샘물처럼 반갑고 싱그럽게 흘러 들어왔습니다.


청년에게 한국에 머무는 동안

좋은 시간을 가지라고 정말 정성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만약 그가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돌아간 후

누군가에게 한국방문을 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명의 한국 방문자라도 더 생긴다면

나를 키워준 조국에 

내 감사한 마음을 아주 작게나마 보탤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한 것입니다.


경복궁 역 앞에서 친구들과 만났습니다.

나까지 다섯,

성중 쌤은 나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나왔는데

자신이 속한 퇴직 교장 선생님들 모임에서 그 분들과 함께

같은 시간에 그 지역 탐사 여정 안내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산행 날짜가 월요일이라서

함께 산행을 하는 친구들은 

교직에 있는 친구 둘과, 은퇴한 친구,

그리고 부러 시간을 낸 친구- 이렇게 넷이였고

나를 합하여 다섯이 한 그룹이 된 것입니다.


다섯 손가락, 

우리는 장갑 안의 다섯 손가락처럼 정겹게 길을 떠났습니다.

출발 전 비보를 들었습니다.

월요일엔 인왕산 개방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호랑이를 잡을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웠지만

나는 "어딜 가도 다 좋고 잘 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딜 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친구들과 고즈넉히 함께 걸으며

시간을 나누 갖는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휼륭한 선물이 되기 때문이지요.


'명품 백'이나 '무료 얼굴 성형 시술권'처럼 비싼 선물이 아니더라도,

아니 그런 선물이 아니어서

우리들끼리 서로 내어주고 받은 시간과 추억은

훗날 더듬어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위로와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비교 불가의 값진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흔히 내가 기억하는 사직공원이 아닌 사직단이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위를 기웃거리자

멀리서 우리의 동태를 감시(?)하던 

한 남자 분이 우리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가슴엔 '문화재 관리청'이라는 글자와 그 아래엔 

그 분의 성함이 새겨진 

이름표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 분은 홍살문의 한 부분을 슬쩍 들어 옮기며 우리보러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돌로 된 초석(?)이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돌은 밟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 분은 이 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사직단에 관한 이모저모를 설명해주시는 분인 것 같았는데

사직단에 관한 지식과 사랑 만큼은 

세상 누구도 그 분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 한가해서인지

그 분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제 흥에 겨워

열정적으로 사직단에 관한 역사와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었습니다.

그끔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침방울아

햇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반짝여서 아름다운 것은 아침 이슬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튀는 침방울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듣고만 있었으면

하루 종일 거기에 발목이 잡혀 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사직단에 대한 지식과 사랑의 양이 그런 것 같았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신호를 보냈고

그 분은 황홀경에서 빠져 나와 우리를 놓아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의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왕산은 오리지 못해도

인왕산 둘레길은 걸을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방향을 위로 잡으면 

바로 산 속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걸었던 둘레길 주변엔 

모두 철조망이 쳐져 있고

군데군데 경찰과 군 초소가 있었고

청와대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는 경찰 한 명이 파견 나와 

지키고 있었습니다.

흰 철제 가방이 있었고

쌍안경을 보관하는 가죽 가방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제 가방 속엔 뭐가 들었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만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사진 촬영 금지'라는 표지가 있어서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못 할 것도 없었습니다.


나같이 보안과 무관한 사람들의 사진 찍을 권리를 제한하면서도

정작 사진을 무기로 삼을 집단들은 

그 표지에 상관 없이

이미 아주 세밀하고도 상세한 사진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다시 보니 그 '사진 촬영 금지' 팻말이 가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오'가 서지 않는 팻말에 대한 

깊은 우수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거창하고 우스꽝 스러울까요?

언젠가 보았던 영화(물론 제목이 떠오리르지 않지만.)에서

박중훈이 연기했던 3류 조폭의 풀기 다 빠진 '가오'가 떠 올라서 

설핏 웃음이 났습니다.


자신은 가오를 목숨처럼 여겨도

부하들조차 우습게 보는 그런 가오.


그러니 심각하고 섬뜩해야할 그 팻말이

저질 코메디처럼 우습고 불쌍하게 생각되어지는 것이지요.

이런 슬퍼서 아픈 코메디는 언제 끝이 날까요?

워싱톤의 백악관에 갔던 기억이 떠 올랐습니다.

돌 하나 들어 던지면 닿을 거리에

백악관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보통 사람들과 대통령이 있는 곳까지의 그 거리.


그 거리가 언제나 말을 나눌 수 있는 곳까지 좁혀질 수 있을런지요.


인왕상 둘렛길이 차도로 끊어진 곳에

윤동주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흑과 백의 단순한 아름다움.

그리고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곳 또한 월요일엔 문을 닫는다고 하더군요.


의미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열리는 문과

가슴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한 사람을 위해 열리는 문

'어느 문이 더 문같은 문일까?'하는

아주 이기적인 생각을 잠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더 윤동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깜빡하고는

잠시 건방을 떨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길을 건너 편에는 김신조 일당이

(내가 기억하는 김신조라는 이름엔 언제나 일당이라는 말도 따라 옵니다.)

그 곳까지 침투했을 때

총을 맞아 사망한 그 당시 종로 경찰서장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1968년이었던가,

까닭없이, 그러나 순진한 불안감이 세상을 떠 돌던 때로

잠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최 무슨 경감이었더가?-


세월이 지나도 세상이 그 분을 영웅으로 기억하겠지만,

(그리고 아주 잊혀지는 것보다 훨씬 낫기는 해도)

어떤 명예도 그 분의 가족들이 한 평생 지고 가야 했던 

슬픔의 무게 앞에서는 가오를 세울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한 생명이 우주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언덕길을 살짝 내려 가니

부암동이라는 곳이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찬 바람 속에서도 정겨웠습니다.

집들이 옆집 이야기가 들릴듯 다닥다닥 모여 있었습니다.

차도 양 쪽으로는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작은 키를 가진 아이들처럼

앙증맞고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마치 미국의 오래된 시골 마을의 분위기가 났습니다.


언 몸을  녹이려 길 가의 작은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참새와 방앗간.


겨울의 방앗간은 따스했습니다.

커피 한 잔에 영일이가 준비한 떡을 겯들여 먹었습니다.

영일이 고백에 의하면 와이프가 준비해 준 떡이었는데

딱 보면 척이라고 부부의 금슬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떠 따뜻하고 맛 난 떡을 방앗간(?)에서 맛 볼 수 있었고

떡을 먹으며 우리는 온전히 참새가 되었습니다.


참새들의 수다


무슨 얘기가 오갔냐고요?

기억이 나지 않아도 따뜻하고 정겨운 온기는 남아 있습니다.

수다는 수다일 뿐입니다.

함께 보낸 시간만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카페에서 나와 북악산 둘렛길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새로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를 걷고 나니 팔각정이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뚫린 팔각정에서

주위를 둘러 보았습니다.

서울의 모습이 보였고 

남산 타워가 안개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뿌연 실루엣으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반대편으로 돌아 보니 산들 가운데 움푹 파인 마을이

서울 도심지와는 반대로 산뜻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부자들 사는 동네지?"


내가 뜬금 없이 물었습니다.

그곳은 평창동이라고 하는데 재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친구들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좋은 곳은 귀신 깉이 알고 차지해 버리는 부자들이니

공기 좋고 자연이 아름다운 곳들 점지해

집짓고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요.


팔각정에서 동희 친구는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오늘 함께 하지 못한 경현이가

뒷풀이를 함께 하겠다는 말을 아침에 듣기는 해습니다만

분당에서 굳이 그 곳까지 온 경현이의 마음 때문에

식었던 몸이 다시 따뜻해졌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와의 접선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한 전화였던 거지요.

팔각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길상사 있었는데

그 곳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길상사 가는 길 주변은 호화 주택들이 주변 언덕을 

빈 틈 없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 때문에

서울 변두리의 빈한한 삶을 상상했었는데

그런 모습 때문에

성북동 비둘기는 더 이상 성북동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경현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키 크고 잘 생긴 경현이의 모습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얼굴도 주름 하나 없이 윤기가 나는지

한 번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습니다.


길상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법정 스님이 거하시던

진현각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툇마루 한 쪽에 스님이 쓰신 책 한 권과 방명록이 있었고 

그 옆엔 스님이 만드셔서 쓰셨던 그 유명한(?) 의자가

주인 없이 빈 자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서 있는 사람들'


대학 다니며 읽었던 책이고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채우고 움직였던 책입니다.


친구들이 나보고 방명록에 대표로 글을 남기라고 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본래 온 곳이 없으니

갈 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쓰고 보니 너무 건방진 것 같았습니다.

부처가 되지 못한 중생의 허물을 그 곳에 남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한 줄 덧 붙였습니다.


"어깨의 짐이 무겁습니다."


아직 내려 놓지 못한 업보가 많다는 뜻으로 적었습니다.

그리 하고 나니 마음이 좀 가벼워 젔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사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유명하다고 했습니다.

돼지 갈비와 떡갈비, 불고기 삼합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100 점 짜리였습니다.

한국에 오면 먹고 싶은 음식 중 하나가 돼지 갈비인데

소원성취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종로에 있는 광장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정말로 발을 제대로 딛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희네 집'에 

친구의 말대로 '운좋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나 다니기도 힘 들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거기에 삶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난 그런 것들이 그리웠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갑 안에 돈이 있어서

마음대로 사 먹을 수도 있지만

함께 먹어주는 사람, 

친구들이 그리웠던 것이었습니다.


녹두 부침과 막걸리를 먹었습니다.

어제 먹은 막걸리는 내 생애 먹어 본 술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하루의 고단함과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막걸리 안에 고스란히 숙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막걸리는 마약과도 같습니다.

작년 청계산 산행을 끝내고 마셨던 막걸리가

그 때까지 먹었던 최고의 술맛이었는데

어제 마신 막걸리가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내년에 마실 막걸리 맛은

또 지금까지의 경계를 뛰어 넘을 맛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친구들과 함께 마시는 막걸리는 마약입니다,


이 막걸리 맛을 기억하며

나를 다시 한국에 돌아올 행복한 꿈을

'노인과 바다'에서의 싼티아고가 큰 고기의 꿈을 꾸듯

그렇게 매일 밤 꿀 것입니다.


인왕산 호랑이는 잡지 못 했어도

우정과 사랑을 포획 했기에

깊고도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화문 가던 길에 만난

기하학.




서촌의 어느 집.

담벼락과 붙어 있는 장독대'

그 밑엔 연탄광이 있었습니다

너무 눈에 익은 풍경이라 한 장.



사직단에서




사직단과 나란히 있는 건물의 벽

자화상.




윤동주 문학관

밤에 별이 아주 잘 보일 것 같았습니다.

윤동주는 하늘나라에서도 별을 헤고 있을까요?



부암동 풍경.

언덕과 골목.




산 길을 걷다 나타난 풍경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다 보니

이렇게 반사경이 곳곳에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곳이 북한산이야.

보현봉, 문수봉,

형제봉,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팔각정에서







나무를 베지 않고

돌축대를 쌓는 마음




법정스님이 계시던 진현각에 이르는 문

법정 스님은 과연 이 문을 좋아하셨을까?

경계를 허무는 것이 도인데---





바람이 부니 풍경 소리가 그윽했습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으로 흘러서 이 곳 풍경에 부딪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아닐까요?


이마저 번뇌입니다.




법정 스님이 만들고 앉으셨던 의자

겨울에도 볕 좋은 날에 거기 그렇게 앉아 계실 것 같았습니다.


빈 의자.

그렇게 비워야 하는 삶.




툇마루의 걸레

마루보다는 마음을 닦으라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범종.

치는 것과 맞는 것이

화합하여 내는 소리.



관(세)음 보살상.

멀리서 보니 성모 마리아를 닮았다.

중생들의 아픈 소리를 들어주는 관세음 보살은

어찌 보면 자애로운 여성성을 지녔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갔던 날은 너무 한가해서

우산처럼 머리 위에 있는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의 마음  (0) 2017.02.27
소심한 복수  (0) 2017.02.23
호텔 주변 풍경  (0) 2017.02.18
한국 방문 셋째 날 일기  (0) 2017.02.18
오늘 일기 (2월 16일)  (0) 2017.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