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은 언제나 옳습니다.(She is always right.)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내가 그녀를 따르고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도 인격이라는 것이 있고
배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집에서 쉬면서 아주 재미 있는 영화를 볼 때나
음악에 빠져 있을 때,
마님의 호출은
나같이 순종에 길 들여진 사람도 은근히 짜증이 나게 합니다.
"A & P(수퍼마켓 이름)에가 가서 달걀하고 주스 좀 사다 줘요."
마님이 내게 원하는 건 절대로 부당한 요구나 명령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법적이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한창 달아오른 기분을
쨍그렁 하고 깨뜨릴 때의 마님의 지시에는
자칫 항명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합니까,
가정의 평화라는 중차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마님의 부탁이나 지시를 순순히 이행하는 수 밖엔 도리가 없습니다.
나 하나의 기쁨이나 즐거움은
대의 앞에
순순히 포기해야 하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윤리 도덕인 걸요.
이럴 때 내가 마님의 뜻을
드러나지 않게 거스르는 나름의 계책이 있습니다.
마님이 꼭 집어 말 한 'A & P'에 가지 않고
그 곳보다 더 멀리에 있는
'Shop Right(또 다른 수퍼마켓)로 가서
쇼핑을 하는 거지요.
나름대로 독립적인 인격체인
내 자신을 과시하는 방법이지요.
물론 어디 가서 사 왔는지
청문회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아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 표시입니다.
물론 수퍼마켓의 이름이 인쇄된 비닐 백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용의주도함도 필요합니다.
그 때의 쾌감이란----
그러나 드러내서는 아니 되지만서도요.
임무도 완수 하고 복수도 하는
일석이조,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게 바로 이런 경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제 마님에 대해
제대로 한 방 날릴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평소에 좋아하는 사진 작가의 전시회에
가려고 하는데
나보러 호텔 옆에 있는 '맥도날드'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으면
마님이 천천히 거기서 나랑 합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땐 왜?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된 다는 것쯤은
산전수전 , 공중전까지 경험한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넘버 8' 빅 브렉퍼스트를 주문해서
앉을 자리를 찾고 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음식을 픽업해서 바로 왼 쪽으로 돌아가면
비교적 좁은 통로가 있는데
한 쪽엔 화장실 다른 한 쪽엔 테이블이 놓여 있어서
화장실을 가는 사람 외엔
인적이 뜸한 외진 장소가 있었습니다.
제일 구석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쳤음에도
마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님은 평소에 집에서 놀고 있는 내게
심부름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마님이 직접 하면 오죽 좋으련만
내가 좋아하는 일에 빠져 있는 "꼴'을 못 보는 것 같습니다.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찾아 오라 시키는데
대부분의 경우엔 그 물건이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내 마음이 영화 속이나 음악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름 그 물건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긴 하지만
그 물건이 나타나지 않아 속을 태우곤 하지요.
"여보 그거 여기 없는데----"
물론 말꼬리가 내려감은 당연한 일이지요.
거기 있어서는 안 될 할 그 물건은
마님이 오면 거짓말처럼 짜잔 하고 나타나는 일이
어디 한 두번이어야 말이지요.
결국 마님이 현장으로 출동합니다.
그리고는 찾아오라 분부한 물건을 꼭 집어 내 눈 앞에
펼쳐 보입니다.
"제대로 찾아 본 거예요? 아니 당신 눈에 안 보인다고 물건이 없는 거예요?"
묵묵부답.
어찌 이런 일이 반복된단 말인가?
마님 앞에만 서면 난 왜 그리 작아지는지.
나는 매도날드의 브렉퍼스트를 다 먹고
천천히 뜨거운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도 마님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호텔 로비로 가려고
문 쪽으로 가 보니
거기서 마님은 나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내 모습을 바려견한 마님은
내가 보이질 않아 호텔로 돌아 갔다가 다시 왔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결정타를 먹일 순간이
내게 찾아 왔습니다.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수 없이 되풀이되었던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침착하고 낮은 어조로 말 했습니다.
"여보 날 제대로 찾아보기나 한 거야?
아니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없는 거냐고?"
내가 자랑스러웠고
해방을 맞은 대한 국민의 환희를 맛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님은 뻔뻔하고 태연했습니다.
"아니 밝은 데 놔 두고 구석에서 먹어요?"
마님은 내 카운터 펀치에도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방 카운터 펀치를 마님께 먹임으로
나의 자존과 독립인임을 만천하에 고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의롭고 장한 내 모습을 씹고 되 씹으며
마님이 잠든 야심한 이 시각에
홀로 깨어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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