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추수감사절 유감

추수 감사절 유감


미국에서는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Thanksgiving Day (추수 감사절)라고 해서

연방 공휴일로 온 국민이 이 날을 기념한다.


추수 감사절엔 학교도 며칠 문을 닫고

직장에 따라서 일요일까지 쉬는 곳도 많으니

그야말로 크리스 마스와 함께

온 가족이 모이는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이다.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서부터

'full house'가 되는 날이 며칠 되지 않는데

추수 감사절이 그 중 하나이니

추수 감사절이 낀 주가 시작되면서부터

가슴이 설레는 걸 주체하기가 힘이 든다.


올 해 추수 감사절 저녁 식탁에 모인 사람은 

손주 둘과 사위 둘을 포함해서

모두 열 셋이었다.


막내 아들만 오질 못 했다.


딸 셋과 아내가 협심 해서 저녁 상을 차렸다.

큰 딸이 대학에 가면서부터

추수 감사절 저녁 식탁은 딸들 몫이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맡아서 요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함께 하는 즐거움을 서로 나눈다.


전통적인 추수 감사절 메뉴로는

보통 옥수수와 스트링 빈, 얌과 함께

빠지지 않는 것이 터키(야생 칠면조) 요리다.


터키는 몸에 지방질이 없어서

좀 퍽퍽한 탓으로 별로 맛이 없는 편이다.

요리하는 데도 시간과 정성이 보통 드는 것이 아니다.


버터를 바르고

이리저리 돌려 가면서

오븐에 너 덧 시간씩 구워야

먹을 만한 요리가 된다.

그래도 고기가 퍽퍽해서 크렌베리 소스나

파인애플을 곁들여 먹는다.


올 해도 터키는 큰 딸이 구웠다.

정성껏 구웠어도

터키 요리의 인기는 노력을 배반하고 말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큰 딸은 내년부터는 터키 요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은근히 비추었다.


우리 두 사위를 비롯해서

내가 아는 미국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터키는 그리 사랑 받지 못하는 요리에 속한다.

노력에 비해 그다지 맛이 없는 터키보다는

누구나 좋아하는 닭고기 요리가

추수 감사절 식탁에 오르기를 원한다.


터키 요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추수 감사절에 터키 대신 닭고기 요리를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으니

대박이라는 생각을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환영 받지 못 하는

터키를 왜 추수 감사절에 먹어야 하는 걸까?


추수 감사절의 유래는 1621년 10월로 거슬러 올라 간다.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영국을 출발한

청교도들이 미국의 매사추세츠의 플리무스에 도착한 것이

1620년 12월.

그들은 혹독한 뉴 잉글랜드 지방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

먹을 것도 별로 없는 데다가

거주할 집도 없어서 그 해 겨울을 지나고 나니

추위와 배고픔, 영양 실조로

병들어 죽은이가 쉰 명이 넘었다.


드디어 봄이 오고

아녀자를 합친 70여명의 이민자들은

그 땅에 살던 원주민(흔히 인디언이라고 불리는)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죽은 물고기를 퇴비로 만드는 법이며

옥수수와 얌, 스트링 빈 같은 농작물 재배법,

뱀장어 잡는 법등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이민자들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원주민들을 초대해 감사의 표시를 했는데

그것이 추수 감사절의 효시라고 한다.


먹을 것도 별로 없을 때

야생 칠면조는 아주 중요한 단백질의 공급원이 되었을 것이고

맛을 따질 여유가 없을 그 당시엔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육고기였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터키는

추수 감사절에 빼 놓을 수 없는

메뉴로 자리매김 했을 것이다.


처음 출발했던 인원의 반 가까운 사람들이

일 년 동안 죽음을 맞이했던

그 고난의 시간을

그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그들에게 도움을 준 원주민에 대한 고마움,

그 마음으로 마련한 식탁의 중앙에 

터키가 놓였을 것이다.


그들이 마음 속에 지녔던 감사의 마음은

무엇 무엇 때문이라는 조건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무조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무런 단서를 달지 않은 무조건 감사가

그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화목하고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있었다.

그 가족은 매일 저녁 식사 후에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하고 하루의 일과를 서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 집에서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기도 하는 동안은 고양이가 방해하지 못 하도록

고양이를 기둥에 묶어 두었다.


그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생겼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마음이 공허해졌다.

어릴 적엔 행복했었는데

성공을 하고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별로 행복하지 않은 까닭을 곰곰히 생각한 끝에

고양이를 기둥에 묶어두었을 때

행복했던 기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당장 고양이를 구해서

기둥에 묶어 두었어도

다시 행복해 지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것은 가족들이 모여서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지

고양이를 기둥에 묶어서가 아니었다.


참 행복의 본질은 잊은 채

껍질만 보고

껍질에만 집착할 때 

행복은 결코 보이지도 누릴 수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맛이 덜한 터키를 제쳐두고

맛 있는 닭고기만 밝히다 보면

감사의 마음은 실종된 

껍데기 뿐인

추수 감사절을 지내게 될 것이다.


감사는

'때문에'라는 조건에 상관 없이,

'---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걸 추수 감사절의 유래는 밝혀주고 있다.


무조건적인 감사를 할 때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터키를 먹으며 

자꾸만 되새김질 한다.


내년에도 터키 요리는 우리 집

추수 감사절 식탁의 중앙에

당당하게 자리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끔은 멈추어 서서 돌아보기  (0) 2016.12.20
걱정 말아요,그대  (0) 2016.12.08
추수감사절과 13이라는 숫자  (0) 2016.11.25
Thanksgiving Day 하루 전 날에  (0) 2016.11.23
미님께서 찍으신 사진  (0) 2016.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