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 손가락 그리고 길 가의 돌
나는 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손으로 무얼 하는 게 영 불안하고 어색합니다.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연필을 썼습니다.
나중에 샤프 펜슬이라는 것이 나와서 연필을 깎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시대가 오긴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연필은 하나하나 손으로 깎아서 써야 했습니다.
그 때는 연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산 물건들의
품질이 형편 없을 때였습니다.
문방구도 예외는 아니어서
연필 심이 힘이 없어 잘 부러지고
깎기도 전에 이미 심이 곯은 것도 있어서
학교에서 짬짬이 연필을 깎아야 할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그 때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했습니다.
어릴 적에 샤프 펜슬이 내게 주어 졌다면
나는 정말 공부를 잘 했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연필 나빠서 공부 못 했다'는 우스개 소리는
나를 위한 맞춤형 변명입니다.
'개발 쇠 발'
글씨를 못 쓰는 걸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물론 내가 이 범주에 포함됩니다.
글씨가 개발 쇠 발 이니 그림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학교 때 여학생들이 '가사'를 배울 때
남학생들은 '제도' 같은 걸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슨 설계도 같은 걸 오밀조밀,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는 과목이었는데
그걸 할 때마다 '가엾으신 어머니 왜 나를 나으셨나요?'라는 가사가 들어간
맹인 가수 이용복의 노래가 떠 오르곤 했습니다.
18" (인치)
머리부터 심장까지의 거리입니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긴 거리이기도 합니다.
머리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 올라
그걸 베풀고 나누는
손까지 도달하는 거리가 길다는 말입니다.
그, 거리, 그 시간.
나는 손재주가 없을 뿐 아니라
머리에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손재주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 자화상을 그리자면
아마 'ET' 같은 형상일 것입니다.
머리는 크고 작은 손과 팔이 달린 팔다리를 가진 기형적인 그런 모습.
손재주는 없어도
어릴 적 손이 예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습니다.
"남자 손이 왜 이렇게 예뻐?"
이런 말을 들으면 배시시 입 꼬리가
오르락 내리락 했습니다.
잘 할 줄 아는 것이 없이 예쁘기만 한 손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
거칠어지고 볼 품도 없어졌습니다.
이젠 정말 내 손에는 어떤 찬사도
선뜻 내어줄 수도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손재주는 나아질 기미가 고양이 터럭 만큼도 없는데다가
미모까지 빛을 잃으니
이젠 더 이상 내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의미 할 뿐 더러 두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내 손에서 맛을 앗아간 것은 비단 굵어진 손가락 마디뿐만이 아닙니다.
특별히 두 번 째 손가락은
안 쪽으로 20도 가량 휘어서
오른 쪽과 왼 쪽 검지를 맞대면
그 빈 공간이 길죽하고 야윈 하트 모양을 만들 정도입니다.
검지, 또는 인지라 부르는
두 번 째 손가락이 그리 휜 것은
벌써 26 년 째 하고 있는 세탁소 일 때문입니다.
세탁과 다림질이 끝난 옷을
옷걸이에 걸고 포장을 해서
콘베이어에 걸었다가 손님에게 찾아주는 게
내가 세탁소에서 하는 일인데
일 주일에 천 벌이 넘는 옷의 무게가
내 손, 특별히 두 번 째 손가락에 얹히기 때문입니다.
손재주는 없어도 예쁘던 손의 전성시대는
26년 동안 서서히 저물어 갔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휜 손가락 때문에
우리 아이들 다섯,
모두 반듯하게 잘 자라서
제 자리, 제 갈길 찾아서 떠났습니다.
벌써 딸 둘은 결혼을 해서
손주가 둘이나 됩니다.
정종수 시인의 길가의 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중에 내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자꾸자꾸 뒤로 내 빼다가
할 수 없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슬그머니 손재주 없는 내 손,
더 이상 예쁘지도 않은 손,
그래서 등 뒤로 감춘 손,
그 중에서도 둘 째 손가락을
쭈삣쭈삣 마지 못해 내어 놓을 것입니다.
길 가의 돌 하나 제대로 치운 적이 없는
손, 그리고 손가락 밖엔
정말 내어 놓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