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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나의 음악 이야기 - 다시 돌아온 1980년의 봄

다시 돌아온 1980년의 봄

 

 

 

 

나의 음악 이갸기 -다시 돌아온 1980 년 봄


1980년 2월 끄트머리의 어느 날,

나는 용산역에서 광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 지역에서 임관한 ROTC 보병 소위들을 태우고

광주에 있는 보병학교로 향하던

특별 열차였다.

 

열차 안에는 막 싹을 틔운 보리처럼

푸릇푸릇한 젊음들이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웅 나올 사람이 없었음에도

내 눈은 창 밖의 인파 사이를 천천히

저인망 그물처럼 훑었다.

 

-내게도 무슨 미련 같은 게 있었나 -

 

보병학교로 출발하기 얼마 전에

H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다.

난 제법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죽어야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죽겠습니다."

 

그것이 젊은 패기였는지 아니면

어린 치기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때 그 마음은 진실이었다.

 

마흔 중반이었던 교수님은

죽는다는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때는 내 귀에

교수님의 그 말씀은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살다

교수님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니힐리즘에 깊이 빠졌던 나는

삶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보병 학교로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도 이별의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렸는지는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녀는 내게 눈송이 같은 존재였다.

희고 순수한-----

 

눈송이는 바라볼 때 아름답다.

내 옷깃에 머물면

내 체온으로 그냥 녹아서 소멸하는 존재,

그 눈송이 같은 여자는

내 곁에 머무르면 곧 소멸하고 말 것만 같은

두려움을 지닌,

그런 존재였다.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눈송이처럼 희고 순결한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주었으면 좋을 그런 존재.

 

그래서 그녀에게 이별의 편지를 써서 부치고

광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옷에 붙은 먼지 털 듯. 그렇게 털어버리면

털어질 것 같은 것이

미련인 줄 알았다.

그런데 창 밖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움직이지지 않고 있음은

내 마음이 강하게 흔들리고 있음의 반증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모습이

내 눈의 촛점에 잡혔다.

내 친구와 함께였다.

혼자서는 나를 떠나보낼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우린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것은 마치도 종교 예식을 하는 것 같이

엄숙하고 장엄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떠났다.

마음에 새겨진 문신 같은

그녀에 대한 미련의 흔적이 지워지길 바라며.

 

80년 3월, 봄은 왔어도

광주는 추웠다.

무등산자락을 훑어 내려온 바람은

뼛 속 깊은 곳까지 후비고 들어왔다.

아무리 반짝이는 소위 계급장을 달았어도

훈련 받는 이들은 춥고 졸리기 마련이다.

 

그 빡빡한 일정과 구속이

그녀에 대한 미련을 지우는 데

한 몫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아쉬움을 지우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녀는 더욱 또렷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어릴 적 동전 위에 흰 종이를 대고

연필로 이리 저리 마구 휘 갈기면

다보탑의 모습이 또렷이 드러나듯이,

그녀를 지우려고

그녀에 대한 미련 위에 무수히 연필로

그으면 그을수록

그녀의 모습은 점점 더 또렷해지기만 했다.

 

그리움이 자라나며 큰 고통이 되었다.

 

강한 부정을 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의 절실함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내 절실함의

제일 첫 자리에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보병학교 훈련이 시작된 후 6주인가 8주가 지나서

외박이 허락되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녀와의 만남은 그렇게 다시 이어졌고

그녀는 나의 운명이 되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 후에야

나는 비로소 80년도에 찾아온

 나의 봄을 온전히 맞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보병학교 시절에

그녀만큼은 아니어도

절실하게 원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수 많은 음악 중에도

멘델스존의 바이얼린 협주곡의 선율은

무등산 바람처럼이나

아프게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전쟁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죽어가는 병사가 원하는 담배 한 모금 같이

멘델스존의 바이얼린 협주곡 E minor가

듣고 싶었다.

 

멘델스존의 바이얼린 협주곡을 처음으로 들은 것이

FM 라디오에서였는지

아니면 명동에 있던 필하모니에서였는지

모르겠다.

김영욱이 연주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슬프고도 아름답게 들렸다.

 

내가 살아오면서

멘델스존의 바이얼린 협주곡은 셀 수도 없이

많이 들었어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감동은

마치 첫사랑의 기억처럼 두고 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김영욱의 연주는 그 후에 다시 듣지 못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멘델스존의 음악은

대체로 밝고 활기차다.

그러나 큰 집에 살면서

길에 나와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부잣집 아이의 우수같은 것이

그의 바이얼린 협주곡에 녹아 있는데

김영욱은 그걸 잘 표현한 것 같았다.

 

멘델스존과 김영욱이라는 바이얼리니스트와

내가 이 협주곡을 통해

감성적으로 만나는 것 같았다.

 

바쁘게 사느라 그렇게 잊혀졌던 기억이

4년 전 다시 되살아 났다.

한국에 갔을 때 신세계 백화정 앞의

지하상가를 지나갈 때 였다.

LP음반을 파는 가게가 몇이 모여 있었는데

거기서 김영욱의 멘델스존 협주곡이 실린 LP판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첫 사랑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이 들어가면서 가슴이 콩닥거리는 경험은

그리 자주 하지 못한다.

 

그리워 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영화 같은  일(그룹 '부활'의 노래  가사)들이

내게 일어난 것이다.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그리움 탓인지

나는 김영욱의 멘델스존을

지하상가에서 기적처럼 만났다.

 

그런데---------

 

난 그 날  그 음반을 사지 않았다.

그 음반도 내게는 그녀처럼

눈 송이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내가 미국까지 가지고 가다가

혹시라도 상처름 입을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누군가가 정말

김영욱의 멘델스존의 바이얼린 협주곡을

사랑하는 사람이

잘 간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음 한 자락은 거기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났다.

 

몇 해 전 한국을 찾았을 때

난 다시 그곳을 찾았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섞인 마음이었다.

혹시라도 그 LP판이 거기 있다면

그 또한 내 운명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다시 찾은 그 가게에서

주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난 김영욱의 멘델스존 협주곡을

얻어 간직할 수 있었다.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내 심성이지만

내 이리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음은

내가 그리도 간절히 원했던

그녀와 아울러

멘델스존의 바이얼린 협죽곡을

원 없이 들을 수 있는 LP판이

내 곁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도 봄처럼

그렇게 진한 간절함이야 사라졌지만

그 간절함이 있던 자리에

잔잔한 행복과 감사함이 대신

그득 들어차 있다.

 

이 봄엔 조금 모자랐던

80년도의 봄이 온전히 다시 찾아와

집 안을 온통 봄 기운으로

가득 채워 놓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