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ton John Concert
어제(12월 3일)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라는 곳을 다녀왔다.
영국 출신의 팝 가수 Elton John의 concert가
그 곳에서 열렸는데 그 콘서트에 갔다온 것이다.
국민학교 학생이면
일기 쓸 거리가 하나 생긴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저 그런 맛 없는 음식을 먹는 것 같이
밋밋하기 짝이 없는 밤외출일 뿐이었다.
그저께 저녁에 아내가 말했다.
"내일(12월 3일) 저녁 우리 콘서트 가는 날이예요.
"무슨 콘서트?"
까다로운 귀즈를 힌트도 없이 맞추어야할 경우를
마주 한 것처럼 난감했다.
"Elton John."
아내의 단답형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렇지. 아내가 내 생일 선물로 준비했던
바로 그 Elton John의 콘서트를
아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마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생일이 지난 지 두 달이 훌쩍 넘은 싯점에서
그 일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분명 최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일 것이나
하늘은 그리 편파적이 아니다.
Elton John 같은 너무나 유명한 팝 아티스트의 콘서트라면
호기심에라고 누구나 한 번은
가 볼만한 공연이 아닌가?
그런데 사실 난 별 흥미가 없었다.
생일 선물이라고 하니 받긴 받았지만
그리 마음이 땡기는 선물은 아니었다.
담담히 받을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누가 하사하시는 선물인데
안전에서 싫은 기색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Elton John의 노래 중
대학 다니며 들었던
'Tonight'이나 'Sorry seems to be hardest word' 같은 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이고
지금도 집에서 LP 음반으로 들으면
가슴이 떨리고 영혼 마저 흔들리는 것 같은 명곡들이다.
그리고 다이아나 왕세자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만들었던 'candle in the wind'도 참 좋아한다.
또 제목도 모르고 가사도 모르긴 하지만
몇 곡 정도는
노래가 나오면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릴 정도이다.
그런데 연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끄러워서이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서
온 몸과 마음으로 연주를 하는데도
내겐 소음으로만 들리는 걸 어찌 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
내 음악적 소양이나 감성이
낙젯점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집에 Elton John의 LP 음반이 석장 있는데
그 중에서 위에 말한 곡만 낼름 골라 듣고
다른 곡은 야예 듣질 않는다.
편식도 그런 편식이 없다.
그러니 Elton John콘서트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설레임이나 흥분 같은 감정은 거의 없었고
그저 담담했다.
오히려 평일 저녁에 어딜 다녀오는 것이
좀 귀찮고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생일 선물이었다.
선물을 한 사람을 실망, 혹은 실망을 넘어 절망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미 할아버지가 된 세월을 살아온 내가
그 정도의 눈치는 갖추어야 기본적인
인간의 조건을 지니는 셈이 되질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런 말을 콘서트가 열린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이크를 들고 했다면
그 자리를 성한 몸으로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콘서트가 열린 메디슨 스퀘어 가든은
콘서트가 진행되는 두 시간 30 분 동안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라는 아주 진부하고 생기 없는 표현이
꼭 어울리게 열기로 가득 찼다.
전철을 타고 연주회장에 도착했을 땐
오후 7시 30 분이 채 안 되었다.
콘서트 시작 시간까지는 30 분도 더 남았다.
공연장 안은 한산했다.
일찍 온 사람들은 곳곳에 있는 매점에서 산
핫독이나 프렛즐 같은 것으로 요기를 하고
맥주 같은 음료를 마시는 것이 보였다.
특이한 것은 공연 장 내부에도
매점이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공연을 보면서 먹고 마신다는 점이었다.
링컨 쎈터를 비롯한 다른 공연장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가능했다.
음식을 먹는 일은 물론
사진 촬영도 가능했다.
링컨 쎈터를 비롯한 공연장에는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링컨 쎈터의 경우 카메라를 보관소에 맡겨야 하며
보관료 3달런가 5달러를 내야 한다.
지레 겁을 먹고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미리 도착해서 별로 할일도 없고 해서
공연장의 좌석 수가 얼마나 되는지 세려다가 -------
포.기.했.다.
좌석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나중에 보니 경우에 따라 다른긴 해도
거의 2만 개의 좌석이 있다고 한다.
콘서트의 경우엔 2만 석은 아니어도
1만 석은 훨씬 넘을 것 같았다.
속으로 '저 많은 자리가 다 찰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내 팔자 - 남 걱정 하기-다.
권투, 아이스 하키, 농구 같은 스포츠 경기와 함께
이런 콘서트까지 열리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일 년 통안의 이벤트 숫자가 약 320 여 건이 된다고 한다.
일 년 동안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의 숫자와
돈의 액수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되질 않는다.
그 돈이 모두 다 나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다 세지도 못하고 인생 종 칠 것 같다.
꿈 깨고
있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콘서트 시작 시간 8시가 가까워 지자
처음엔 휑하니 비었던 자리가
거의 다 찼다.
콘서트가 시작 되고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들어오더니
'결국은 송곳 하나 놓을 자리 없이 다 찼다.'
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라는 것이
조사해 보면 담박에 드러날 것이긴 하지만
거기에 있덨던 가람들은 누구나
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었다..
사람들,
그리고 돈.
우리가 산 티켓은 한 장에 100여 달러 짜리였다.
비싼 좌석은 하나에
700달러나 한다고 아내가
귀띰을 했다.
아니게 아니라 숫자 개념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내가
그 돈의 액수 헤아리다간 제 명을
다 못 살고 죽을 것 같아
시작과 동시에 돈 헤아리기는 멈추었다.
내 주변의 자리는 100% 다 찼다.
우리 왼 쪽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10대로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온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연신 무어라고 아들에게 말을 해대는데
아들은 돌부처 같이 입을 꾹 다문 채
무대꾸로 일관했다.
아들은 무언가 못 마땅한 것 같이 보였다.
하기야 관람객 대부분이 내 나이 또래거나
나보다 더 나이가 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이들이나 10대들은 거의 눈에 띄질 않았는데
옆의 10대 소년은
아버지가 동무하기 위해
살살 꼬드겨 데리고 온 것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말로는 먹히지 않으니
아들에게 음료수며 스낵 같은 걸 사 주면서
물질로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 같은데도
아들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사내는 Elton John을 꿰 뚫고 있었다.
노래마다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다.
드럼과 어우러진 밴드가 꽝하고 큰 폭발음 같은 걸 낼 때면
어김 없이 타이밍을 맞추어
주먹을 팔과 함께 내려치는 걸 보아
전 곡을 다 외우고 있는 골수 팬이었다.
노래도 다 따라 부르고 박수는 기본이요,
때때로 괴성으로
노래에 응답했다.
그에게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 격인 Elton Joh의 노래가
기막히다는 판단이 될 때면
"O My God!"이라고 중얼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감탄의 표정으로
어김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것이었다.
때론 괴성으로 추임새까지 넣는 걸로 보아
우리 같이 얼치기는 아니고 고수였다.
키도 나만큼 아담했던 그 사나이가
우러러 보이도록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몰입.
그 사람 본전 완전히 뽑았을 것이다.
그 왼 쪽엔
키가 큰 중년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았는데
올 때부터 맥주를 들고 와서 마시기 시작하더니
콘서트 중에도 몇 번이고
맥주를 사러 들락 거리는 바람에
우리는 몇 번이고 앉았다 섰다를 반복해야 했다.
나중엔 내가 농담으로
다음부터는 toll비를 받는다고 했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통행료를 내야할 돈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민폐를 끼치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도 염치가 없어서였는지 모르겠으나
잠시 후 뒤에서 자기 와이프를 불러내더니
아예 매점 앞에 자리를 잡고 둘이 서서
자유롭게 맥주를 마셔댔다.
음악과 술.
아, 즐거운 인생.
더 바랄 것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 옆에는 엄마와 딸로 보이는 여자가 앉았는데
프랑스 말을 썼다.
아마 뉴욕에 머무는 딸을 방문한 엄마가
딸과 같이 공연을 보러 온 것 같았는데
공연 자체보다는 두 사람 모두
전화기로 동영상 찍는데 열중했다.
그리고 우리 바로 앞에는 키 큰 중년의 남자가
길고 검은 코트를 입고 나타났는데
어깨의 반이 덮이는 챙 넓은 까만 중절모를 쓰고 있는 것이
여간 멋들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이 나이를 먹었어도
멋있는 모습이 부러워지는 걸 어쩔 수 없다.
모자를 쓰면 영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을
원망하는 것이 이런 순간이다.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딸로 보이는 예쁘장한 아가씨 둘과 함께 왔다.
그의 아내는 앉은 자리에서
몸과 팔을 흔들며 연신 들썩이며
공연에 열광했는데
그는 처음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고통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군대식으로 말하자면
콘서트도 그에게는 일종의 사역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나보다도 더 심정적으로
콘서트 저 멀리에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 고급스럽고 멋진 모자를 벗었는데
야마카(유태인 남자들이 쓰는 조그만 빵떡 모자)를 쓰고 있는 걸로 보아
유태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야마카로 덮인 머리 부분 뿐 아니라
더 많은 부분의 머리가 벗겨져 있는 걸로 미루어
모자를 써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모자를 쓴 모습이 아주 잘 어울리는 그의 모습을
난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난 지금 그대로의 내 모습이 좋다!!!!!!!
콘서트가 중반을 넘어서자
처음에는 쭈볏대던 딸들이 발동 걸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와이프는 아예 처음부터 남편은 안중에 없었고
오로지 Elton John에만 집중하며 열광했다.
딸들은 자기 아빠를 안으며
같이 몸을 흔들기를 유도했지만
그는 의연하고 꼿꼿했다.
외길.
그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결코 쉽지 않았을 두 사람의 삶의 길.
빛과 그림자
그 굴곡들이 보였다.
언제부터인지 나에게 그런 것들이 보인다.
얼마만 같이 지내보면
삶의 모습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렇게 흘러온 그 부부의 삶, 그 시간에 축복을 보낸다.
견디며 보듬고 살아온 시간이야말로 정말로 소즁한 가치인 것을.
횡설수설.
무언가 할 말이 뚜렷하지 않으니
사설만 길어졌다.
영양가라고는 하나 없는-- ------
오늘은 여기서 그쳐야 겠다.
두 시간 반 동안의 공연을 보면서
뭐 그리 할 이야기가 있으랴 만은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깃 거리는 더 있다.
결국 횡설수설이긴 하지만.
더 쓸까 말까----
모르겠다.
시간이 허락하면 조금 더 쓰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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