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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한국 방문 - 둘쨋날(1)

한국 방문 - 둘쨋날

 

일찍 잠에서 깨었다.

한국에 가면 늘 새벽 두 세시면 눈이 떠진다.

이른바 시차 때문에 제대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어

늘 멍한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곤 한다.

 

전 날, 어머니는 함께 제천엘 다녀오자고 하셨다.

 

제천은 내가 태어난 영월에서 버스를 타고

약 30 분 정도 걸리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은

충청북도에 있는 제천으로

장도 보러 다니고 농산물도 내다 파는

말하자면 같은 생활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영월 사투리와 제천 사투리는

강원도와 충청북도라는

제법 엄격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닮아 있었다.

내가 태어난 영월의 새내뜰과 제천은

서로 털어버리려 해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존재해야 하는 그런 관계이다.

서로 성이 다른 이복 형제가

한 지붕 아래  얼굴을 맞대고 사는 것과 같은,

게다가 아주 의까지 좋은

그런 관계가 영월과 제천이다.

 

작년 아버지 상을 치르고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영월 선산에 다녀왔다.

밤송이가 땅에 떨어져 툭툭 벌어지던 때였다.

밤송이를 발로 이리저리 길 옆으로 밀치며

오르던 오붓한 산길.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향해 난 작은 길엔

막 물기가 마르기 시작하는 가을 풀잎 향기가 그득했다.

 

산소 앞 쪽으로 멀리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게 아니라 내 기억 속에서는

늘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본 기억은 없어도 소리로 기억하는 고향의 강을

야트막한 산에서 굽어볼 수 있었다.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누구도 내게

 내 고향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고향에는 강이 흐르고 있음을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어릴 적 강물은 내 핏줄 속에

물 소리를 각인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 강을 다시 볼 수 있으려나------

 

어머니가 제천에 가자고 하셨을 때

난 고향 영월까지 들리는 줄 알고 가슴이 설레었다.

내가 태어나 한 두 해 살았던 곳.

고향의 강물 소리와 물빛을 보고 싶었다.

지금은 밭이 되어 있는,

내가 태어난 집터에 들려 56년 전 내 울음 소리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제천에만 들리시겠다는 것이다.

영월 새내뜰에 지금껏 살고 계시는

넷째 할아버지와 의가 나서

왕래을 끊으신 것이 그 원인인 것 같았다.

선산은 원래 아버지가 물려 받으셨지만

아버지 본인이 묘지 관리를 하실 수 없으니

아직 새내뜰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는 넷째 할아버지께 맡기며

아예 산까지 양도를 한 것이

몇 해 전 일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 어머니가 그리도

분노하는 이유였다.

도대체 배은망덕도 유분수라며

넷째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가늘가늘한 몸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톤은 

늘 높이 올라가곤 했다.

 

사실 작년에 영월에 다녀오면서

아쉬운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은퇴하고 나면 한국의 어느 조용한 곳에

작은 집 하나 마련해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선산이 넷째 할아버지께 양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전혀 기대도 욕심도 없었던

땅에 대한 욕심이

한순간

이스트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스물거리며 부풀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이 바라다 보이는 산.

산을 등지고 

물이 바라다 보이은 전망 좋은 곳.

풍수지리를 몰라도

그만하면 집 짓고 살기에

썩 괞찬은 자리가 아닌가.

은퇴 후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깝고 아쉬운 마음이 얼마간 내 마음을 빼곡하게 채웠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살짝 들었다.

"어찌 그리 쉽사리 땅을 넘겨 주셨담?"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버지와 전화 통화할 때

아버지는 나에게 뜬금 없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 미안함의 복합성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이런 저런  마음들을 놓았다.

재물에 비교적 담담했다고 은근히 자부하던 내게

그런 속물 근성이 있음을 마주하고

조금은 부끄러웠던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평소엔 기억 속에 묻고 지내던

지난 날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무작정 집을 나와 분당의 야탑이라는 곳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날로 향했다.

 

아내와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우릴 데리고 가는 형국이었다.

사실 미리 버스 시간도 알아보고 하는 게 정상임에도

우린 8순 어머니의 방식으로 눈 뜨고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었다.

 

대충 눈 뜨고 집 떠나

차가 있으면 타고,

아니면 기다리는 어머니 (세대)의 삶의 방식.

 

야탑의 터미날에 도착하니 여섯 시 30 분 가량 되었다.

매표소에서 제천 가는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첫 차가 8시에 출발한단다.

한 시간 하고도 30 분의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터미날 안의 어느 허름한 간이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머니 두 분이 서로 교대로 김밥을 말거나

라면과 우동을 끓여내며

이른 아침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제법 일찍 일어나 허기를 느끼던 차에

이런 식당은 부담 없이

식탐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김밥과 어묵을 시켰고

중 고등학교 시절 사먹었던 기억 때문에

라면도 한 그릇 시켜서  고춧가루도 살살 뿌려가며

아주 맛나게 먹었다.

옛 추억까지 국물과 함께 훌훌 들여마시니

멍하니 버스 출발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주는 짜증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상점에서 파는 커피도 사서 마셨다.

돈을 내니 봉지에 든 커피와 함께

컵을 주어서

상점 밖에 있는 물통에서 뜨거운 물을 부어 마셨다.

얇은 종이컵은 뜨거운 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얇았다.

잘 못하면 크게 손을 델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이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작은 부분에서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팔지 말던가,

가격에 비해 컵 가격이 지나치게 높으면

가격을 올리면 될텐데-----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말 그대로 종이 한 장으로 만들어진

얇은 컵에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입천장을 델 정도로 커피는

내게 뜨거운 맛을 선사했다.

 

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정확하게 8시에 출발했다.

우리를 포함해 승객은 열 명이 채 안 되었다.

버스회사의 수지 타산이 은근히 걱정 될 정도였다.

버스는 산과 들 사이를 잘도 달렸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에 비하면

모든 산들엔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모양새가 좋은 우리 나라 산들이

참으로 매력적인 모습으로 스쳐지나갔다.

 

들판엔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구름이 덮여 조금 우중충한 느낌이 드는 하늘 아래

벼들은 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농부들에게 저 벼의 황금빛은 희망의 빛일 것이다.

바라만 보아도 포만감이 드는

그런 풍요로운 벼의 빛깔은

사람을 살게 하는 빛이다.

 

묵직한 구름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밝아졌던 건 오로지 들판에 물결치는 

벼에서 나와 떠도는 금빛 때문이었다.

 

창 밖에 펼쳐지는 산과 들이 어우러진

풍경들을 지루한 줄 모르고 구경하다보니

버스는 어느새 제천이라는 사인이 있는 길로 접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제천으로 가는 길은 

시라고 하기엔

시골 같은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다.

전국의 시에도 생명 같은 것이 있어서 한 데 모이면

제천이라는도시는

너무 촌스럽다고 왕따라도 당할 것 같이

시골스런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제천은 셋 째 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셋째 할머니는

어머니가 중매를 섰다.

 

내 할아버지는 모두 5형제였는데

할아버지가 맏이였다.

증조 할아버지가 후처를 얻어

느지막히 자식을 보신 연유로

셋째 할아버지부터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리다.

 

어머니가 중매를 서서 결혼을 시킨 까닭으로

셋째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주머니와 조카 며느리 사이지만

친정 언니 동생처럼 지내고 계신다.

때론 슬쩍 말을 놓기도 하면서,

 그러나 가족간 서열이 있으니

서로간의 품위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친하게 지내고 계시니

첫 방문지로서 제천을 택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셋째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제천에 자리를 잡으시고

주유소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언젠가 할아버지가 중풍을 만나서 그 때부터

할머니가 주유소의 온갖 일을 다 하셨다고 한다.

몇 해전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후에는

아들이 맡아서 경영을 하는데

 제천 시내에 주유소를 네 군데로 확장을 했다고 한다.

 

제천에 간다고 연락만 했지

몇 시에 도착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았다고

버스에서 내리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시간을 말하면 함어니는

도착 30 분전부터 버스 서는 곳에 나와

기다리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한국에 있으면서도 그리 자주 뵐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할머니를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말씀으로 할머니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짐작한 할머니는

화끈한 여장부였다.

그 짐작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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