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아내 알뜰한 당신
9월 1일은 아내의 생일이다.
자기 생일을 유별나게 챙기지는 않아도
무언가 자기를 위해 특별한 것을 챙겨주기는 원하는 눈치는 그제나 이제나 여전하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며 무덤덤히 몇십 년을 그냥 보냈다.
아내는 내 생일에는 시간과 공을 들여 고른 카드에
예쁜 글씨로 쓴 생일 카드를 거른 적이 없는데
나는 그리 한 기억에 없으니
요즘 세상에 늘 받기만 하고
생일 카드나 선물을 챙겨준 적이 없는 남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가 누구에게 선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생각이 많아서이다.
'과연 이 선물이 받는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서부터
이 선물은 너무 상투적이어서 오히려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단
기분을 해치지는 않을까 하는 기우까지
이런저런 생각만 하다 시간을 다 흘려보내기에
아예 포기를 하고 '입체 카드'(포옹)로 때운다.
아내는 내 주변머리 없음을 아는지라 스스로 무엇을 사고는
나에게 통보를 한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고 내가 할 일까지 대신해준다.
그러니 이젠 선물 고르는 능력은 퇴화될 대로 퇴화되어서 불구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아내가 올핸 자신의 생일 선물을 마련하지 않았다.
생일 선물 대신에 올해는 친정 부모님이 와 계시니
어디 밖에 나가서 외식을 할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사실 생일은 자기가 축하받는 날이 아니고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라고
장인께서 늘 말씀을 하신 까닭도 있는 데다가,
언젠가 집에서 스페인 음식 '빠헤야'를 만들어 먹은 걸 아시고는
장모님이 한 번 드시고 싶단 말을 들은 효심 깊은 아내가
맛있다고 소문난 허드슨 강변의 한 스페인 식당을 수소문해서
미리 예약을 하는 것 같았다.
나야 장인 장모님 모시고 식사하는 것으로
아내의 생일선물을 때우면 되니
생일 선물 고르는 일로 더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얼씨구나 하고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생일 전 날 갑자기 계획을 바꾸었다.
혹시 자기 생일 저녁에 '빠에야' 먹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이메일을 아내가 아이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아이들 다섯이 다 오겠다고 답을 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일명 '장영자'인 통 큰 아내가 그러라고 하며
일사천리로 계획대로 진행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예전의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는 자기가 직접 집에서
'빠헤야'를 만들어 부모님과 자식들에게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생일에---------
아내가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내가 군대를 마치고 제대해서 나오던 날
아내는 날 극장식 식당이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촌구석도 그런 촌구석이 없을 정도로 전방 오지에서
2년 동안 살다온 나에게 그 식당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때 식으로 말하면 '함박 스테이크'라는 걸 먹었는데
군대 짬밥에 길들여진 내 입에
함박 스테이크는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은 천상의 음식 같았다.
함박 스테이크는 돈가스보다도 격이 한 단계는 더 높은
아주 격조 있는 고급 음식이었던 셈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tv에서나 볼 수 있는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큰 짐 같던 병역의 의무도 마쳤겠다,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자가
썩 근사한 곳에서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도 사 주겠다,
내 장밋빛 인생이 막 시작되는 것 같은 황홀감에 빠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한 끼 식사였고, 그렇게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그날 아내가 한 끼 식사비로 쓴 돈은 만 원이 넘었다,
참고로 내가 처음 군대 가서 받은 육군 소위의 첫 봉급이 6만 원가량이었다.
짜장면 값이 약 오백 원, 그러니 짜장면 스무 그릇도 넘게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아내는 나를 위한 한 끼 식사비로 써버린 것이었다.
이 여자와 결혼을 하면
평생 난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그날 저녁에 보았다.
바보 온달이 평강공주를 만난 격이라고 할까.
그런데 결혼을 해서 같이 살다 보니
환상은 하나둘씩 깨지기 시작했다.
환상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아내는
누구보다도 손이 컸다.
아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때도 푹푹 퍼주었다.
받는 사람은 물론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똑같은 물건을 살 때도 비싼 가격표가 붙은 걸 사곤 했다.
물건 값이 공연히 비싼 것이 아니라
받을만하니까 그렇게 가격을 붙인 것이라고 하며
싼 건 무조건 비지떡이라는 식이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아내는 한 마디로 '봉'이었다.
"그것만 받고 어떻게 살 수 있어요?" 하며
물건값에 얼마를 더 얹어주는 것도 다반사였다.
특별히 길 가의 노점상들에게 쓰는 선심은
더 후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생계까지 걱정하는 아내를 둔 덕에
평강공주의 남편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꿈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자기가 벌어서 나에게 잘해줄 때는 그렇게나 좋고 행복하더니
내가 힘들게 번 돈으로 남들에게 잘하고 선심 쓰는 걸 보면
울화통이 치밀기도 했다.
나는 평강공주의 남편으로 귀족처럼 살기는커녕
급기야 머슴, 혹은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것 같은 비애를 맛보기도 했다.
제대하던 날 극장식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하남석이란 가수의 '막(밤)차로 떠난 여인'인가 하는 노래를 들었었는데
공주인 아내가 그렇게 바보 온달 남편을 어둠 속에 남겨 두고
자기 혼자 막(밤)차로 떠나버린 것 같은
외로움에 푹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던 아내가 몇 년 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집이 어두우면 안 좋다고
있는 불 없는 불 다 키고 살던 아내가
내가 불을 켜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우면
바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큰돈 쓸 일이 있어도 어떻게 되겠지 하며
일단 쓰고 보던 아내의 태도도 돌변했다.
아무 주유소에나 들어가 개스를 넣으려고 하면
다른 데가 더 싸니 그곳으로 가자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크레디트 카드로 아이들 등록금이며 온갖 공과금을 다 내도록 바꾸더니
급기야 적립된 마일리지를 이용해
한국 다녀오는 비행기표를 마련할 정도로 '알뜰한 당신'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런 아내의 변화는 내심 내가 바라던 바이어서
마음 한 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했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경기가 안 좋은데 모든 물가는 오르기만 하고 내릴 줄 모르니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는 더 이상 '철없는 아내'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겠다는
대오각성을 한 것이지,
그렇다면 그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 이유를 굳이 묻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렇게 아내는 '철없는 아내'에서 '알뜰한 당신'으로 변모했다.
알뜰한 당신은 생일에도 직접 생일상을 차려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우리 식구들 모두를 대접하겠다고 하며
아침부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알뜰한 당신은 가만히 따져보았을 것이다.
장인 장모님과 우리 부부, 그리고 아이들 다섯이
스페인 식당에서 한 끼 식사를 하자면 한 사람 당 50달러로 계산해서
팁을 포함하면 500불은 거뜬히 되는 계산서가 청구될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직접 요리를 한다면
10분의 일 비용이면 더 푸짐하고 맛 난 상을 차릴 수 있을 거라는
'알뜰한 당신'다운 계산을 한 결과
갑자기 외식하기로 한 계획을 바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했다.
아내로서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내는 성장통을 앓기 시작했다.
손목과 어깨가 아프다고 했다.
칼질을 하면 손목과 어깨가 아파 어쩔 줄 몰라한다.
가끔 수박 같은 걸 자를 때나
나물을 무치기 위해 물기를 뺄 때는, 나를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모든 일을 자기가 해 치운다.
솜씨 없는 나를 시키자니
일을 더 엉망으로 만들기 십상이니
차라리 아픈 몸으로 손수 해치우는 것이 아내로서도 맘이 편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늘 손목과 어깨의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기야 다섯 아이들 키우느라 오직 일을 많이 했을까.
철없는 아내라지만
실제로 자신을 위해서는 귀금속으로 자신을 치장한 적도 없을뿐더러
값비싼 옷 한 벌 제대로 해 입어본 적이 없다.
'철없는 아내' 시절에도 사실은 나와 우리 아이들,
그리고 이웃들을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히기 위한 것이었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함은 아니었다.
손목과 어깨가 아픈 '알뜰한 당신'은
자기 생일에 손수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음식 재료를 도마 위에 놓고 칼질을 시작하는데
또각또각하는 소리에서 아픔이 묻어 나왔다.
내 뜻대로 '철없는 아내'가 '알뜰한 당신'이 되어
저리도 억척을 떠는 걸 보는데
기쁘고 흐뭇하기는커녕 눈이 자꾸 아파왔다.
마음 한편은 또 왜 그리 아려오던지-------
'알뜰한 당신'이고 뭐고
아픈 곳 없고 당당하기만 했던
'철없는 아내' 시절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생일에 카드나 선물을 준비하기는커녕
이렇게 철없는 생각만을 하고 있는 나야말로
'알뜰한 당신'의 '철없는 남편'이 아닐까?
https://blog.daum.net/hakseonkim1561/468#none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일까, 슬픔일까 (0) | 2013.09.18 |
---|---|
아쉬웠던 순간 (0) | 2013.09.05 |
예순 즈음에(2) (0) | 2013.08.29 |
Marantz로 받은 음악 선물 - Paganini Violin Concerto (0) | 2013.08.08 |
나비, 그대가 부처로소이다 (0) | 2013.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