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탁닛한 스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부지런히 걸어가는 사람을 본 스님이 말한다.
-저 사람은 바쁘게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결국은 무덤을 향할 텐데-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천천히 걷는 사람일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천천히 맛 보면서 사는 삶.
밥을 씹지도 않고
삼키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천천히 곰씹어야 제 맛이 나는 법이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바쁘게 걸어야
천 년 만 년을 산다한들 어디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올해는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려 한다.
커피 내리는 기계를 새로 장만했다.
한 잔 씩만 나온다.
나만을 위한,
그리고 또 한 잔은 다른 이
또 그 한 사람만을 위해-------
아들이 기꺼이
나와
또 아내를 위해
커피를 만들어주었다.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아빠 한 사람.
엄마 한 사람.
그렇게 한 사람씩 천천히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들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집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커피 맛을 볼 것이다.
몇 해동안 방치되었던 나의 놀이터.
폐허가 다 되었다.
내가 즐겨 음악을 듣던 곳이다.
컴퓨터에서 원하는 음악을 듣는 편리함 때문에
마음이 멀어졌던 우리집 지하실의 한 모퉁이.
우리 아들들과
동네에 사는 조카들이 게임을 즐기는 아지트로 사용되었다.
그 아지트를 마침내 탈환했다.
이 어지러운 혼돈의 상태.
오디오 선을 정리해서 새로 연결해야 하는 등
할 일이 많다.
청소도 해야 한다.
그래도 천천히 걷기 위해 이 일을 해야 한다.
턴 테이블.
별로 좋은 것은 아니니만
그런대로 소리가 난다.
천천히 걷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다.
내가 LP판으로 음악을 들을 쓰는 앰프다
1978년도 형이던가. Fisher 250.
아는 분이 오년 전 쯤에 인터넷에서 구입해 주신 것이다.
내 기억으로$ 150정도 였던 것 같다.
완전 구닥다리다.
리모트 컨트롤이 아예 없는 아날로그 방식이라
손으로 켜고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른다.
그런데 그 소리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타악기 소리는 내 귀가 아니라
내 가슴을 두드린다.
세상이 주는 기쁨 중 하나다.
그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룬
디지탈 앰프는 아직 연결 상태를 확인도 하지 않았다.
소리의 질을 이 Fisher와 비교를 할 수 없다.
거의 이십 년 전에 산 klipsch 스피커.
그 때 내 기억으로 $5000. 정도 지불한 것 같았다.
우리 아들들 키가
이 스피커보다 턱 없이 작았던 시절이다.
이 스피커로 듣는
중저음의 첼로와 더블 베이스 소리가 일품이다
어제 '봄의 제전' 첫머리에 나오는
바순의 솔로를 들으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눈도 잘 안 보이고 머리도 둔해져서
이 어지러운 선들을
다시 연결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큰 아들이 다시 연결해주었다.
어제 거의 서너 시간 동안 음악 들었다.
음악 속에 가라앉았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내가 대학 에 다닐 때 산 것이니 37, 8년 전 것이다.
성음에서 라이센스를 얻어 국내에서 생산한 것이엇다.
그전에는 불법으로 복사한 '빽판'으로 들었는데
합법 판이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음질은 영.
미국에 와서 산 원판을 들어보면
정말 상대가 되잘 않는다.
그래도 엤추억이 솔솔 살아났다.
치직거리긴 해도
칼 뵘이 지휘하는 베를린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스트링을 요즘 어디서 손쉽게 들을 수 있겠는가.
전인권의 노래도 들었다.
성당 바자에서 $1 주고 산 것이다.
나나 무스꾸리의 노래도 들었다.
아마도 내 또래 한국 남자들의 가슴에
LP판처럼 새겨졌음직한 촉촉한 그녀의 목소리.
언젠가 나이 들어 한국에서 한 공연을 보았는데
소리도 더 이상 예쁘지 않고 힘이 없어서
섭섭하고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이 LP판 안의 그녀는 여전히 젊고 싱싱했다.
아들도 내 옆에서 음악을 들었다.
거의 세 세간을 함께 있었다.
제임스 테일러, 퀸, 스티비 원드도 들었다.
"아빠,늘 듣던 노랜데 이렇게 들으니 영 새롭네"
아들도 구식으로 음악을 듣는 묘미를 살짝 맛 본 것 같았다.
TV 채널도 일 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돌려가며 보는 아이들인데
판 한 쪽의 음악이 끋날 때까지 귀를 기울여
음악을 듣는 아들의 모습에서도
천천히 걷는 삶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Bronica Medium Format Camera.
그리고 Canon A-1 필름 카메라.
미국에 와서 첫 주급을 받아
산 카메라다.
$200. 한 주 주급을 다 써버렸다.
필름을 사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현상소에 맡기고
사진이 나오기까지 설레임으로 기다렸던 그 시간들.
디지탈의 편리할 때문에 그 기쁨과 설레임을 다 잃어버렸다.
사진을 찍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지워버리는
편리함 때문에
내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설레임과 기쁨을 포기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필름을 사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카메라 전문점에나 가야 살 수 있다.
카메라에 필름을 끼우고
셔터를 누를 때도
지울 수가 없기에 주의와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게다가 단촛점 렌즈이기에
원하는 프레임을 얻기 위해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하는
빌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이런 수고로움과 불편함에도에도
내 마음에 설레임이 다시 살아난다면
나는 다시 젊은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올 한 해 느리게 걷는 일은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시인의 '그 꽃'이라는 시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보물찾기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께서
세상 곳곳에,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 사이에
아름답고 귀한 보물을 숨겨 놓으셨다.
그 보물을 찾는 일은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여유롭게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해야할 것 같다.
달리는 사람의 눈에는
어디 보물이 눈에 들어오겠냐는 말이다.
가슴이 설레는 걸보니
내 마음에
파릇파릇 봄꽃의 싹이 돋으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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