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nza 일기 - 라 베르나 성지( The Sanctuary of La Verna)를 찾아서
2023 년 10 월, 아내와 나는 Pienza라고 하는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처음 3 일은 다른 곳을 가지 않고 Pienza와 얼굴을 트면서 동네를 어슬렁 거렸다.
10 월 4 일에 처음으로 마을을 벗어났는데 목적지가 라 베르나(La Verna)였다.
라 베르나는 차를 운전해서 Pienza로부터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성지에 가기 위해서는 경사가 급하고 굴곡이 심한 산길을 가야 했다.
산을 오르는 길은 10 미터는 쉽게 넘는 나무들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10 월 4 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아씨씨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로 기념한다.
뜻깊은 날에 라 베르나를 찾아가는 것은 일종의 순례라고 할 수 있으니
신앙인으로서 내 자신이 제법 기특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출발을 했다.
순례길 답게 길이 험했다.
때로 거의 180도로 차의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이 기도와 순례를 위해서 그 길을 걸어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를 타고 가는 우리에게 순례라는 단어는 사치였다.
성지 주차장에 도착하고 보니 띄엄띄엄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마주치는 어려움 중 하나가 주차이다.
나는 한 달 동안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주차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늘 이탈리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꼭 해야 한다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거나 배웠겠지만
사람들과 좀 더 많은 접촉을 하겠다는
여행 첫머리에 세웠던 계획을 실현{?} 하기 위해서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거절하거나 주저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성소의 주차장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다짜고짜 내 차 주위에 주차를 한 중년 여인의 팔을 잡고
주차권 발부하는 머신으로 가서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렌터카가 신형이어서
운전하면서 잘 몰랐던 기능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는데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음에도
자기 시간을 할애하면서 가르쳐 주었다.
10월 4 일이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이어서인지
주차장은 순식간에 빈 공간이 눈에 뜨이게 줄어들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성지까지 10 여 분을 걸어야 했는데
높고 깊은 산길을 걷는 산뜻하고 성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성소를 한 번 둘러보고 Siena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30분만 기다리면 뜻깊은 곳에서
감격스러운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다렸다가 미사참례를 할 수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 문을 나서는데
성당 밖에도 많은 순례객들이 모여 있었다.
미사를 마치고 라 베르나 성지를 출발해서
Siena로 가기 위해 산길을 내려오던 중
하이킹을 하던 사람이 차를 얻어 타기 위해 손짓을 하는 걸 발견했다.
순간 머릿속이 칡뿌리처럼 엉키는 것 같았다.
"태워줘, 말어."
산길에서 그냥 지나쳐도 나를 부도덕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내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차를 타고 그 사람 곁을 지날 것이니 말이다.
"하필이면 왜 내가?"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사람 옆에 차를 세웠다.
성지 순례도 하고 미사 참례도 해서 마음이 좀 너그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차를 좀 태워줄 수 있겠냐는 게 그의 부탁이었다.
Siena까지 가야 하는데 조금 돌아가면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산길을 하이킹하는데
아마도 그날은 다리가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다.
차로 30 분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서
그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받았다.
그리고 다섯 상처 때문에 육신의 고통을 견디면서도
선교와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 그에 비해
나의 인색함이 부끄러웠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상처를 갖게 된다.
외적인 상처도 있지만 마음의 상처도
내 뜻과 상관없이 생기는 게 삶의 이치다.
고통과 아픔을 품고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어떻게 해서
고통 중에서도 선교와 설교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산을 내려오면서
곤경에 빠진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 사람을 돕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내 마음에 양심의 가책이라는 상처 하나는 지워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주어진 상처를 끌어안고만 있으면 고통으로 남겠지만
아픔 속에서도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면
그 고통도 기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차는 어느새 굽이굽이 산을 내려와
그 사람의 목적지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리면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Grazie"라고 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Prego(천만에요.)"
나는 진심으로 내 마음에 상처를 남지 않게 해 준 그 사람이 고마웠다.
-그 사람이 혹시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니었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는 Siena로 떠날 수 있었다.
다미아노 십자가가 부착된 옛 수도원 건물
옛 수도원에서 성당까지 연결되어 있는 회랑
중정의 우물
왼쪽의 종탑이 있는 건물이 대성당.
바실리카 마이너
오른쪽 종탑이 있는 건물이 오래된 성당.
프란치스코 성인의 요구로 지어졌다고 한다.
나무 십자가의 유래나 의미는 모르겠으나
십자가 밑 바위에는 도마뱀들이 많다.
대성당. 마이너 바실리카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을 때 입었던 수도복(?)
천사가 예수 잉태를 알리는 장면
하늘의 천사들의 긴장과 기대감이 넘치는 표정.
마리아의 손에는 이사야 서가 펼쳐져 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리아의 자유 의지로 구원의 역사가 막 시작되려는 순간. 1475 년 작품
성당이 있는 곳의 높이가 해발 1128m라고 한다.
날이 춥고 안개도 자주 끼어서 프레스코벽화 대신 세라믹으로 벽화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성모 마리아와 하늘의 천사들의 시선이 모두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모여 있다. 1479년 작품
성모승천
성당 내부
대성당에서 오상을 받은 경당으로 가는 회랑
회랑 끝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몇 개의 경당이 있고
그 끝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Stigmata)을 받은 경당이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는 그림
꽃이 놓여 있는 육각형 모양의 틀이 있는 곳이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은 곳.
경당의 제대 뒤 벽에는 안드레아 델라 롭비아(Andrea Della Robbia)의 세라믹 작품이 있다.
작품에는 천사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마돈나의 발, 성 요한, 성 프란치스코 및 성 제롬이 슬퍼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1481년 작품.
the Chapel of Santa Maria degli Angeli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
라 베르나 성소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216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 옆 고해소 앞
돌틈 사이에 피어난 꽃,
십자가의 길 중
옛날에 걸어서 다니던 길
성지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고 한다.
'세상 어디에도 이보다 거룩한 산은 없다'
라 베르나: 프란치스칸의 갈바리아 1
라 베르나(La Verna)는 아페니노 산맥의 한 부분인 고립된 하나의 둔덕이다. 최고 높이는 1,283 미터에 이르나 성지는 해발 1,128 미터이다. 그 일단은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들과 드러난 바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바위들 가운데 일부는 깊은 균열을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오랜 세기 전에 있었던 강한 지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산은 13세기 초에 키우시의 오를란도 카타니(Orlando Catani) 백작의 소유였다. 그는 이 산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 오를란도는 이 지방의 지주였으며 군사적 정치적인 수완으로서보다는 성 프란치스코와의 우정을 통하여 역사에 알려졌다. 1213년 프란치스코는 마로코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프란치스코는 레오 형제와 함께 로마냐의 몬테펠트로(Montefeltro)에 이르렀고 인근 성 레오 성에서 멈추게 되었다. 새 기사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하여 프란치스코는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성 레오 광장에서 설교하였고, 이에 감명을 받은 오를란도 백작은 사적으로 자신의 영신 사정에 대해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일련의 대화 이후 백작은 라 베르나 산을 성 프란치스코에게 선물할 뜻을 밝혔고, 프란치스코는 그 곳이 속죄와 기도생활에 적합한 산이라면 백작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하였다.
몇 달 뒤 프란치스코에 의해 파견된 두 형제가 이 산을 답사하였고 마침내 형제들은 기도와 관상에 아주 적합한 조그마한 봉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어 그 장소에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들과 성인의 거처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오상 2 참조).
프란치스코가 라 베르나에 처음 올라간 것은 1214년으로 보고 있고, 그 뒤 다섯 차례, 즉 1215년, 1216년, 1217년, 1221년 그리고 1224년에 그 곳에 간 것이 확실하다. 1224년의 마지막 체류는 아마도 좀 더 길었던 것 같고 분명히 더 기억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는 9월 14일경 이 곳에서 오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9월 30일 오를란도 백작이 보낸 나귀를 타고 보르고 산세폴크로, 몬테카살레, 치타 디 카스텔로를 거쳐 포르치운쿨라로 돌아갔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 곳에 머물렀던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아마도 1230년 6월과 10월 사이였을 것이다. 1250년 경에야 계속적인 체류에 관한 근거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때는 이미 더욱 견고한 건축물들이 있었다.
1259년 9월과 10월 사이에, 당시 총봉사자였던 성 보나벤투라는 여기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과 “삼중도(三重道)”를 저술하였고, 또한 아시시의 클라라 수녀원의 클라라 자매들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1260년(8월 20일?)에는 성 보나벤투라와 인근 지역의 7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축성이 있었다. 2, 3년 뒤 오를란도 백작은 세상을 떠났는데, 나중에 그는 이 성당에 묻혔다.
카살레의 우베르티노는 1305년 3월 19일부터 9월 29일까지의 그의 체류기간에 그의 유명한 작품 “예수의 십자가 생명나무”(Arbor vitae crucifixae Jesu)를 썼다. 그리고 라 베르나의 복자 요한(1259-1322)은 거의 30년 동안 이 곳에서 보속과 관상의 삶을 살다 132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443년 9월 당시 이탈리아 관구들의 총봉사자 대리였던 요한 카페스트라노는 그의 보살핌 아래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지침서(회헌)를 작성하기 위하여 이 곳을 찾았다. 그가 작성한 회헌(Capisteranenses 1443, pro Observantibus Cismontanis)은 회규에 대한 주석 형태의 것으로서, 옵세르반티 형제들의 이상을 담고 있었으며, 형제들이 지켜야 하는 개별 규정들이 덧붙여졌다
'라 베르나 성 프란체스코(La Verna Santuario Francescano) 수도원' 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 아레쪼 지방의 고립된 아펜니노 산맥 정상 부근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해발 1,128m 의 고지에 위치한 라 베르나 수도원은 그 역사가 천년에 가까운 카말돌리, 발롬브로자니 수도원과 더불어 이탈리아 중부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서깊은 수도원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회의 창설자이자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성인으로 불리는 프란체스코 성인께서 예수의 오상(예수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힐 때 입었던 다섯 상처가 성인들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받은 성지로도 유명합니다.
지금의 프란체스코 교황님께서 이 프란체스코 성인을 따라 '가난한 삶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시기도 했지요.
현재 라 베르나 수도원에는 여전히 '청빈' , '정결', '순명'의 수도원 정신을 실천하면서 많은 수도사분들이 생활하고 계십니다.
(-진주의 세상에서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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