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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길, 또는 희망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길, 또는 희망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이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신의 길 중에서-

 

어제 10.84 마일을 뛰었다.

1 시간 하고도 47 분을 쉼 없이 달렸다.

 

Beach 122 스트릿을 출발해서 126 스트릿까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워밍업을 한 것이었다.

거기서 방향을 돌려 Board Walk가 끝나는 Beach 9 스트릿까지 달려갔다가

돌아서서 우리 집이 있는 Beach 116 스트릿까지 뛰었다.

 

어제도 바람이 몹시 불었다.

우리 집 화장실 변기에 물이 출렁거리고 있다는 것은

바람이 제법 세차다는 일종의 시그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일단 긴 팔 옷을 입었다.

그리고 바지는 짧은 것을 골랐다.

아파트 건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찬 바람이 맨 살이 있는 다리를 휘감고 지나갔다.

뛰려는 의지는 순간적으로

내 몸처럼 움츠러들었다.

 

내가 달리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100 가지도 넘게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출발 전에 왼쪽 배 윗 쪽에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뛰다가 혹 배라도 아프다면---'

'너무 추워서 감기라도 걸리면----'

 

뛰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머릿속에서 줄줄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꼭 뛰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만 뚜렷했다.

그것도 나 혼자 했던 약속이어서

그것을 내 속에만 간직하고 있었다면

나는 뛰어야 하는 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힘들고 아프게 살던 강아지 Clementine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겨 있던 둘째가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겠다는 말을 할 때

나도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어서 

달리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나의 결심을 아내에게 발설한 것이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아내는 둘째에게 아빠의 기특한(?) 생각을 고해바쳤고

딸아이도 강아지와 이별한 상실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아빠의 마음에 자기의 마음을 더해서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서로를 격려하며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얼마 전에는 러닝슈즈와 양말을 주문해서 내게 보내주었다.

물론 어제도 그 신과 양말을 신고 뛰었다.

 

Beach 9 스트릿까지 뛸 때는 내 앞에서 바람이 저항을 했다.

머리가 앞으로 흘러내리지 않아서 어쩌면

시야가 깔끔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는 바람이 내 등을 미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좀 단축하고 싶은 욕심이 나서

어떤 구간에서는 빨리 뛰었더니

그것이 독이 되었던 것 같다.

8 마일 구간이 시작되면서 허벅지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 무거운 느낌은 거리가 늘어나면서,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강도가 짙어졌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117 스트릿까지 달렸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뛰었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메달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딸아이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는 마음 하나가

나를 중간에 세우려는 마음을 접고

끝까지 뛰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처음 길을 가지 않으면 새로운 길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돌부리를 밟으며

길을 가고,

또 누군가가 그 길을 따르다 보면

길에도 길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윤이 나는 법이다.

 

부처가 열반에 든 것도,

에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그 길을 따르면 새로운 곳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의 길을 연 것이 아닐까.

길은 형상이기도 하지만

이념이기도 하다.

 

육십을 훌쩍 넘은 내가

에제와 새삼 이 나이에

이렇게 19 킬로 미터가 넘는 길을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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