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나의 길
지난 일요일 오후 두 시 사십 분.
하늘엔 구름이 그득했고,
낮은 기온에 바람까지 제법 세게 불어서 그런지
바깥 기운의 간을 보려고 창문을 연 낸 몸에는
소름 꽃이 돋았다.
내 생에 처음으로 10 Km가 넘는 거리를
밖에서 뛰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아무래도 바람의 속도가 뒤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게다가 뛰는 도중 비를 만날 확률도 있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봄날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우리 아파트 1 층의 실내 체육관의
러닝 머신 위에서는 이미 6 마일과 8 마일을 뛰어본 경험이 있어서
목표인 11 마일은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힘이 들어 포기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자신감만큼이나 큰 몫을
내 맘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은 묻고 무심한 척,
반환점을 돌아서
어딘가에서 만나면 내게 줄 물병을 지참하고 걷기로 한
아내를 뒤로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이 있는 116 스트릿에서
Board Walk가 끝나는 9 스트릿까지
100 블록이 넘는 거리를 왕복하는 여정이었다.
사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 살면서
Board wsalk가 끝나는 곳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길을 가는 데는
호기심과 함께 두려움도 따라가는 법이다.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위기가 찾아왔다.
뱃속이 영 불편했다.
배가 출렁거리는 것이었다.
사실 긴 거리를 달리기 전에 과식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점심으로 비빔밤 한 그릇에
라면까지 한 그릇을 별생각 없이 해치웠다.
식사를 한 뒤 한 시간 조금 지나서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한창 소화가 진행 중인 음식물들이
몸속에서 일제히 봉기를 한 것이었다.
처음 열 블록은 다리도 무거운 데다가
배가 불러서 겨우 겨우 달릴 수 있었다.
이브 같은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힘들면 그만둬. 그렇게 죽자 사자 뛸 필요는 없어."라고
말했을 것이다.
열 블록을 넘어가자
뱃속의 파도가 잔잔해졌다.
너무 무리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반환점을 스무 블록쯤 남겨두고
한 청년이 나를 지나쳐 달리는 것이 보였다.
너무 빨라서 따라붙을 수가 없었다.
그 청년의 속도와 나의 속도,
시간과 거리의 차.
그리고 달리는 나와, 걷고 있는 아내와의 거리.
뛰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반환점까지 마지막 열 블록은
바다 쪽으로 하얀 모래가 깔려있었고
반대편은 아이들 놀이터가 있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반환점을 돌아설 때에도
두 가지 느낌이 있었다.
뿌듯함, 그리고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그렇게 나의 여정은 무리 없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런데 25 스트릿에서 시작해서
거의 60 스트릿까지 바다 반대쪽 Board Walk 옆으로는 건물이 없이
황량한 벌판이 이어졌는데 바람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갈 때는 바람의 영향을 몰랐는데
반대 방향으로 뛰니 그 저항이
얼마나 세게 느껴지는지
포기라는 단어가 갑자기 머릿속에 반짝하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바람의 방향은 여전히 같았는데
어느 쪽으로 달리느냐에 따라
그 영향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가는 일-
내 뒤를 따라 걷던 아내와는
50 스트릿에서인가 만났는데
아내가 내미는 물병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별로 갈증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저녁에 잠들기 전에 늦은 갈증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관성으로 달렸다.
하나하나 늘어나는 도로 표지판의 스트릿 숫자로 위안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열 블록쯤 남기고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의 근육이 조금 불편했지만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거의 12 마일 가까운 거리(19 KM)를 쉬지 않고 달렸다.
서정주 시인의 시 '바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
126 스트릿에서 9 스트릿까지의 길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내가 그 길을 뛰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길이었을 뿐,
나의 길은 아니었다.
내가 그 길을 뛰고 나니
그 길은 내 안으로 들어와
비로소 '나의 길'이 된 것이다.
두려움을 이기고,
숨 가쁨을 견디며
19 Km를 달려 만난 나의 길.
나는 나의 길을 달리곤 난 뒤,
다시 그 길을 거슬러 걷기 시작했다.
내 뒤를 따라 여즉 걷고 있는 아내와 동무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길을 가기 위해 잠시 잊어야 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일.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왔던 길을 걸어가며
환갑을 훌쩍 넘기고 나니
이제 철이 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앞을 가로막던 바람결이
그제사 부드럽고 시원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무슨 까닭일까?
https://blog.daum.net/hakseonkim1561/2706#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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