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토불이-네순 도르마(Nesun Dorma) vs 막걸리 한 잔
내가 미국에 온 것이 1984 년 3 월이다.
내 나이가 만 스물일곱이 되던 해이다.
올 해가 2020 년이니 미국에 산 것이 36 년이 훌쩍 넘었다.
미국 생활이 한국에서 산 시간을 거의 10 년이나 앞지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고 꾸준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 식성이다.
바로 밥과 된장 고추장을 기본으로 하는
한식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야말로 일편단심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씩 고급 이탈리아 식당에서 값비싼 파스타를 먹으며
마음속으로는 "이게 라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안되면 김치라도 곁들여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한식에 대한 나의 편향됨은 거의 중독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의 한식 사랑은
죽을 때까지 바꾸려는 마음이 바닷가의 조약돌 하나만큼도 없으며
어떤 강요에 의해서 바뀔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어쩌다 한끼를 피자 같은 것으로 먹을 때면
어김없이 내 인생의 소중한 한 끼를 도둑맞았다는 생각이 드니
나의 한식은 신토불이의 지경을 넘어
거의 병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음식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토불이라고 나팔을 불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살짝 예외가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한국 가요, 특히 발라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트로트라는 장르에는 어려서부터 애써 고개를 돌렸다.
어릴 적 이미자의 구성진 노래는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범주에 속했다.
송창식이나 양희은, 오니언스 같은 포크 송이나 팝송을 들어야
비로소 교양 충만한 젊은이의 범주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들은 잘 듣지 않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아는 척 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막걸리에 대한 나의 사랑을
고등학교 친구들의 밴드에 고백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한 친구가 유튜부에 영탁이라는 가수가 부르는
영상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막걸리라는 신토불이 술이 트롯트와 내가
손을 잡도록 중매장이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덕으로 '미스터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게 되었는데
조금씩 트롯트의 유치함(?)에 빠지게 되었다.
감정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가사의 솔직함과
때론 흥겹고 때론 서럽고 눈물겨운 멜로디가 어우러지는
트로트를 고개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몇 주 전 토요일 아침,
물건 값을 갚아야 하는데 깜빡 잊고 수표를 잊고 출근을 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빈 수표 한 장'
이 다섯 자를 입력하는데
뜬금없이 '막걸리 한잔'이라는 트로트의 멜로디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빈 수표 한 장'이라고 쓰며
'막걸리 한 잔'의 멜로디를 입혀 노래를 불렀다.
수 백 번도 더 들은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아리아 '네순 도르마'도 다섯 글자인데
하필이면 두어 번 밖에 들은 적이 없는 '막걸리 한 잔'의 멜로디가
내 입에서 뛰쳐나온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노랫말 그대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나의 음악적 취향이 완전 타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타락인가,
아니면 음악적 취향도 음식과 마찬가지로
내가 태어나고 27 년을 산 모국의 신토불이는
음악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인가를
묵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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