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산책 - 봄이 입으로 흘러들다
일요일 아침 산책을 나섰다.
요즘 세탁소 문을 늦게 여는 까닭에
저녁에만 하던 산책을 아침에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일요일 아침에 마님이 물었다.
"동네 산책할까요?
아니면 High land Park로 가서 할까요? "
평일에는 동네 산책을 하니
분위기 바꾸기 위해서 차로 5 분 거리에 있는 공원으로
원정 산책을 가자는 제안이었다.
그 분이 제안을 하실 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일요일이니까 당근 High Land로 가야겠지?"
마님은 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님을 행복하게 하는 건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사소한 일이다.
무심하고 둔한 내가 이런 마님의 사인을 읽어내는 데
십 수 년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High land park의 주차장은 닫혀 있었다.
9 시부터 주차장을 여는 것 같았다.
차를 돌려 인근 도로 옆에 주차를 하고 공원으로 행했다.
이슬비가 내렸다.
안개인지 아니면 비의 비말 때문인지
공원은 나름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공원 안의 배구 코트의 네트는 보이지 않았고
네트가 걸리는 기둥에는 노란 테이프가 둘려져 있었는데
"단체 운동을 하지 못 한다."는 내용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로부터 과거엔 눈에 띄지 않아도
지금 보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참 많이 약탈해 가는 것 같다.
배구 네트를 거는 기둥에 감긴 리본의 노란색이 쓸쓸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내년 봄 노란 개나리가 피면
어떤 느낌이 들까?-
내년 봄에는 개나리의 노란 색이 명랑함을 선물해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소박한 기원을 했다.
저수지 주변을 걸었다.
둑 아래 물이 있던 저지대에는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다.
비에 젖은 나무는 어둔 색을 띄고 있었는데
아직 잎이 돋아나지 않은 상태여서
칙칙하고 암울한 기분이 들었다.
저수지 산책로 부옆에는 간간이
꽃이 돋아난 나무들이 눈에 띄었는데
잠시 멈추어 눈을 맞추고 바라보니
눈물나게 기특하고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봄이 오는 건가?-
산책을 마치니 마님은 뭔가 아쉬웠는지
그 전 주에 다녀왔던 Shirley Chisolm 공원으로 쑥을 캐러 가자고 했다.
해풍쑥 - 바다 바람을 맞고 자라는 순결한 쑥.
비가 살살 뿌리는 까닭인지 으슬으슬 가벼운 추위가
바람막이 자켓 속으로 스며들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 순결한 해풍쑥으로 쑥개떡을 해먹자는 말에
내 마음이 사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데 공원에 도착해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아예 문을 닫은 것인지,
아니면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문이 닫혀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우리가 살던 동네를 돌아보며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뒷 쪽 자마이카 베이로 연결되는 하천의 옆으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호젓하고 예쁜 길이었다.
거의 30 년이 지난 시간이 만들어 놓은 변화였다.
산챌로 주변에는 자줏빛의 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그 풀꽃의 주변에는
여린 쓱들이 풀꽃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원에 가면 해풍쑥을 캘 수 있지만
당장 눈 앞에 있는 예쁜 쑥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언덕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으니
순수 해풍쑥은 아닐지언정
바닷바람을 살짝 받은 준 해풍쑥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2-3 분 동안 쑥을 캐니 준비해 간 백의 1/4 정도가 찼다.
공원에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쑥을 다듬어 쑥개떡을 만들었다.
쫄깃한 찹쌀에 섞여 쪄낸 쑥의 향기가
입 속에 퍼지는 순간 비로소 번쩍 마음의 눈이 뜨였다.
꽃을 보면서도 별로 느끼지 못했던 봄을
쑥개떡을 먹으며 견성을 하듯 깨우치고 느끼게 되었다.
'Drinking Song'을 쓴 시인 Y.B Yeats가
이 쑥개떡을 맛 보았더라면 영 다른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이런 시의 첫 구절이
'쑥개떡은 입으로 흘러들고
봄도 입으로 흘러든다.'
돌아오는 주일 아침
아내가 멀리 산책 가자고 제안을 하면
주저하지 않고 앞장 서서 길을 열 것이다.
입 속에 비밀스레 번지던 쑥향이 그립다.
산책로에 그려진 사인.
보행자의 가슴이 뻥 뚫려 있다.
물론 닳아 없어지긴 했어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폐가 사라진 사람으로 내 눈은 해석을 했다.
어린 왕자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전혀 무섭지 않은, 그러나 누구에게는 공포스러운,
그런 그림
아내가 이름을 가르쳐 주었는데
잊어버렸다.
봄이 오긴 온 것 같다.
저수지의 흔적.
갈대의 새 순이 돋아나려면 두어 달 더 기다려랴 할 것 같다.
꽃 대신 빗방울 꽃
이슬비가 가지을 타고 내여왔다.
나무 기둥이 젖은 곳도,
아직 젖지 않은 곳도 있다.
삶도 그렇다.
자줏빛 나무꽃.
봄이 되면 우리가 살던 동네에 처음 피던 나무꽃.
우리가 살던 아파트
산책로 주변의 꽃,
그리고 쑥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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