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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통도사 홍매화 타령

통도사 홍매화 타령


"우리 한국 가면 통도사에 홍매화 보러 가요."


이렇게 말 하는 아내의 볼에는 홍매화 빛이 돌았다.

그렇게 아내의 홍매화 타령이 시작되었다.

홍매화를 보기 위해 

아내는 이리저리 시간을 조절해 한국 방문 날짜를 잡았다.


아내는 통도사의 홍매화를 구경하기 위해 가는 길에

경남 함안에도 들리자고 했다.

함안은 곶감으로 유명한 곳인데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깎아 말리는 풍경을 보고 싶다고 해서

함안을 통도사로 가는 길에 경유지로 점을 찎었다.

그러나 아내가 놓친 것이 있었는데

이미 곶감철은 끝이 난 까닭에

언제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뗀 표정으로 

함안은 우리에게 바람을 맞혔다. 


곶감이 있는 풍경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우리는

함안에 있는 고택들을 둘러 보고 

부산의 광안리로 향했다.

아내는 바닷가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부산의 광안리 바닷가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고

우리는 새벽에 양산의 통도사로 향했다.

부산에서 통도사까지 가는 방법이야 여러가지 있겠지만

우리는 가장 쉽고, 빠르지만,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방법을 택했다.

바로 택시를 이용한 것이다.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고 통도사까지 가자고 부탁을 했다.

택시비는 5 만 5 천원이라고 해서 무조건 OK라고 했다.


시의 경계를 벗어나는 택시 요금 체계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우리 같은 여행객에게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양산의 통도사라고 했더니

택시 기사의 귀가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그냥 기사라고 해야 될 것을 굳이 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절에 가시나 봐요?"


기사님의 공손한 물음에

나는 "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기사님이"절에 가냐?"는 질문은

"불공드리어 가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에 가는 것은

불공에는 뜻이 없었고

통도사의 그 유명한 자장매를 보기 위함이었다.

절에는 가지만

불공을 드리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부연 설명할 필요를 할 필요까지는 없어서 

단답형으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다.


목적이 어찌 되었건

단연코 우리가 절에 가는 길이었다는 사실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흔히 염불에는 뜻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속담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였다.

절과 불교에 대해서는 새끼 손톱 만큼의 지식이 있는 관계로

은연 중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택시 기사는 

우리를 신심 깊은 불자로 오해를 한 것이었다.

외국에 살면서 한국에 다니러 와서

시간을 내어 절을 찾는 신심 깊은 불자로 단정 지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주저리주저리 자기 이야기를 늘어 놓는 것이었다.


자기도 불교 신자이며

몇 년 전까지도 일 년에 한 두 차례는 꼭 절에 다녀 왔는데

작년엔 한 번도 절에 가질 못했다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닌가.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사는 속으로 이렇게 읊조렸을 것 같다.


"사는 게 뭔지---"


나는 기사의 넋두리에 맞장구를 쳐 주었는데

기사는 그 댓가로 택시 요금에서 물경 5천 원을 깎아 주었다.

불공 대신 승객에게 보시를 한 셈이었다.

그 기사는 내가 불공을 드리며 자신의 공덕도

슬쩍 끼워서 불전에 바치길 바랬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보통 미안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기사의 보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통도사에 들어가면서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매표소 직원에게 (신심 깊은) 불자가

불공 드리러 가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입장료도 내지 않고 우리는 목적지에 이르를 수 있었다.

성인 1인 당 3 천원, 둘이면 6 천 원이 굳는 순간이었다.


주차장까지 우리를 데려다 준 기사는 

다리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면 절에 갈 수 있다며

마지막까지 친절한 안내를 해주고는

온 길을 돌아 나갔다.


깎아 준 택시 요금 5 천원과 면제 받은 입장료 6 천 원을 더하니

도합 1 만하고도 1 천원의 보시를 기사는 우리에게 한 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사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홍매화를 찾아 걸음을 옮기기 바삤다.


결국 우리는 애타게 그리워 하던 홍매화를 만났고

몇 송이 피지 않은 고운 꽃과 꽃망울의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비교적 따뜻했던 서울의 날씨만 의지해

얇은 옷을 입고 갔던 내게 

통도사의 홍매화는 매서운 추위와 바람으로 

감기를 선물로 주었다.

누군가에게 받은 은혜와 호의를 나누지 않고

혼자 낼름 삼켜버린 업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매화타령은 내 기침 소리로 끝을 맺었다.


통도사에 다녀 온 지 일 년 가까이 되는 요즈음 

나는 심한 감기를 앓고 있다.


세상과 이웃이 베푸는 은혜를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반성하며

목구멍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새로운 (홍)매화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족)

통도사의 홍매화는 자장매라고 하는데

그 유래는 이렇다.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통도사 중창에 나선 우운대사는 

1643년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축조하고,

불교계 스승의 영정을 모시는 영각을 건립한다. 

상량보를 올리고 낙성을 마치니 마당에 홀연히 매화 싹이 

자라나 해마다 음력 섣달에 분홍빛 꽃을 피웠다. 

불자들은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와 이심전심으로 통했다고 여겨 

자장매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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