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시간, 흑백 tv

1.흑백 tv

어린 시절 동네에는 tv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동네 만화 가게에는 마켓팅 용으로 한 대 씩 들여 놓았는데
아이들에게는 성지였다.

만화 10 권을 보면 tv 한 번을 볼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김일이 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이면
만화가게는 또래 아이들로 붐볐다.
(그 때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김일이라고 불렀는데
진짜 이름이 김12였는지 김일이 였는지 헷갈렸다.)

만화가게 미닫이 유리창은
풀칠한 종이로 가려져 있었다.

밖에서는 아이들이 tv 한 귀퉁이라도 보려고
미닫이 문을 슬그머니 열곤 했는데
만화가게 아저씨는 tv가 아닌
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원칙에 충실한 냉정한 사업가였다.

문을 한 뼘 도 열 시간도 주지 않고
호통소리와 함께
호통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미닫이 문은 냉정하게 닫혔다.

김일이 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이면
쿠폰을 가진 아이들에게
공짜 tv를 보여 주면서
만화방 아저씨는
떡볶이나 오뎅 같은 간식거리를 팔면서
짭짤한 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안에서 환호하는 친구들의 소리를 들으며
김일이의 박치기로
상대 선수가 크로키 상태가 되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바깥 세계의 아이들도
흥분 속으로 휩쓸렸다.

안과 밖의 경계.

유리 미닫이 문이 갈라 놓은 두 세계


안에서 나는 소리로만으로
시합 상황을 그려내야 했던
문 밖의 꼬맹이들.

어린 시절의 로망이었던 흑백 tv는
이제 누구 하나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다.

화려한 순간은 있어도
화려했던 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등 뒤에 남겨진 것들.

시간은 영광은 가져가고
물건, 혹은 기억만을
남길 따름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들 없는 아버지 날  (0) 2018.06.16
아들 머리에 난 새치  (0) 2018.06.15
마음의 체중계  (0) 2018.06.05
안녕? 나도 안녕. 행복이 대순가?  (0) 2018.06.04
미소를 사수하라!  (0) 2018.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