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밤에 큰 아들이 돌아왔다.
law school 마지막 학기를
영국 런던의 King's college에서 보내고
이번 일요일 졸업식을 위해서 돌아온 것이다.
다음 날은 내가 아침 일찍부터 Upstate 뉴욕에 있는 교도소로
대자 면회를 갔다 돌아와서는
부랴부랴 가게 정리를 한 뒤에
뉴욕을 방문한 고교 동기와 저녁 식사를 하느라고
플러싱에 갔다가 늦게서야 집에 돌아왔다.
큰 아들은 어제 또 워싱톤으로 떠났다.
오늘 친구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서다.
결론적으로 수요일에 돌아 온 아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큰 아들 준기는 어려서부터 집 안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반짝반짝 하는 위로 세 누나들의 위세가 워낙 등등하다 보니
별들을 빛나게 해 주는 어둠 같은 존재였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 아빠를 부를 때도
아주 빠른 속도로 '아빠'를 세 번씩 불러댔다.
누나들 말에 귀를 기울이는 아빠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 집 안 분위기가 얼마나 서운했으면
하루는 '나는 브레인이 없다'며
그리 섧게 울었을까?
그런 준기에게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으니
친구들과의 관계를 아주 아름답게 유지하고 이어간다는 점이다.
준기를 싫다고 하는 친구들은 듣도 보도 못 했다.
친구들의 부모들로부터도
준기의 아름다운 품성을 칭찬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학교 공부는 중간 정도 했을까?
잘 모르겠다.
딸들 처럼 꼭대기에 있어야 관심이 가지
그렇고 그런 성적은 흥미나 주의를 끌만한 깜이 되질 못 했다.
아예 관심이 없어야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2 학년 까지는
성적이 형편 없었다고 한다.(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준기의 성적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삶의 행복 지수는 급한 하강 곡선을 그리기에
무소식이 희소식인 셈이다.
그런 준기가 달라진 계기가 있었으니
워싱톤 빈민가로 봉사 활동을 다니면서부터였다.
그 때까지 별 어려움이 없이 살아 온 준기는
또 다른 삶과 사람, 그리고 사회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전공을 심리학에서 정치 행정으로 바꾸었다.
3 학년부터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주 성적이 좋다고 하는데
확인한 바는 없고 아내를 통해 들은 게 전부다.
졸업한 뒤에는
워싱톤에 있는 크라이슬러 로비회사에서 3 년 정도 일을 하다가
로스쿨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로스쿨을 가기 위해서는
LSAT라는 시험을 보아야 했는데
내일 졸업하는 학교 뿐 아니라
하바드나 예일의 로스쿨도 가능한 점수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거 실화냐?'
그 때부터 큰 아들에 대한 나의 불신은 시작되었다.
입학하면서 부모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했는데
학장님이 그 학교 학생들은 일주일 평균 공부하는 시간이
64 시간 정도 된다는 말을 했다.
그 때부터 나의 걱정은 시작되었다.
비싼 등록금이며 생활비를 대야 하는 것은 둘 째 문제였다.
아니 문제도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 말했듯이) 브레인도 없는 아이가
그 유명한 로스쿨에 어찌어찌 입학을 했다고는 하나
당장 한 학기를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에 근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이 한결 같이 그렇긴 하지만)
특별히 우리 큰 아들은
엉덩이에 굳은 살이 없어서
의자에 30 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오리엔테이션에 가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게 근심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첫 학기가 끝났다.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Guess what?"
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What?"
담담하게 뭔 일이냐고 물었다.
성적이 모두 'A'가 나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상위 5 % 안에 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What's wrong with you.?"
아들이 대답했다.
"I don't know."
자기도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도 믿지 못 한다.
학기 중간에도 친구 결혼식이라며 영국에도 다녀 오고,
또 한 친구가 NBC TV의 Saturday Night Live Show의
고정 코메디언이 되었다고
축하를 해 주기 위해
뉴욕까지 올라와 1 박 2 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아들은 한 학 년이 끝나고 로펌에 인터뷰를 해서
다국적 로펌에 합격을 했다.
작년에 인턴을 마치고
드디어 올 해 졸업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자기 말로는 인턴을 하는 동안
부서장들이 자기에게 눈독을 들이며
서로 영입을 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올 해 초 영국에 간 아들에게
처음 학기가 시작할 때 물어 보았는데
공부가 좀 헐렁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공부가 헐렁한 탓인지
아들은 주말마다 유럽 각 국을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몰랐다.그리고 모르는 게 약이다.)
우리 아이들끼리의 연락 체계,
그리고 자기 사톤들끼리 통하는 온라인을 통해서
들어오는 소식통은
거의 빠짐 없이 유럽을 헤집고 돌아다닌 것으로 짐작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공부를 하긴 한 건가?)
하기야 고등학교 때 시험 기간 중에도 늦게까지 놀러다녀서
내가 한 마디 했다.
"준기야, 너는 잘 놀아서 마음도 몸도 건강하지?"
아빠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순진하게 그리고 자신 만만하게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공부는 몰라도 노는 건 어디에 내 놓아도 지지 않는다.
인턴을 같이 했던 동료들 사이에서도
우리 아들은 노는 건 '짱'이라고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한 달 쯤 되었을까?
세탁소로 아들의 졸업 가운이 배달되었다.
(정말 졸업을 하는 걸까?)
의문이 들긴 했지만 잘 다려서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큰 아들이고 해병대에 있는 작은 아들이건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아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빠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겨낸다고 한다.
그 아이들의 아빠는
지금은 부르클린에 살고 있지만
뉴저지에서 출퇴근 할 때면 하루 평균 길 위에서 3 시간 이상을 보냈다.
아치침다섯 시 반에 출근해서
집에 돌아 오면 저녁 8 시 반에서 9 시,
그렇게 20 년 넘게 살았다.
만성 피로가 내 몸을 떠나지 않았다.
눈은 늘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 아이들의 말은 내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된다.
그리고 내 삶을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아들들을 보며 다짐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에너지를 , 그리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사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 아들이 정말 졸업을 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러
몇 시간 후에 워싱톤으로 떠날 예정이다.
드디어 졸업 가운을 입은 아들을
'이제 만나러 갑니다.'
졸업 가운을 입고 이름이 불려지고 졸업장을 받고 나서야
'이거 실화냐?' 라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올 것 같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쓸 것인지 말 것인지 그것이 문제로다 (0) | 2018.06.01 |
---|---|
우요일 (0) | 2018.05.27 |
어느 봄 밤의 꿈 (0) | 2018.05.16 |
세탁소에서 생긴 일 - 반면교사 (영역) (0) | 2018.05.12 |
상처 - 빈 배가 될 수는 없을까?(축구장에서) (0) | 2018.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