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부활절.
토요일 저녁 부랴부랴 일을 마치고 뉴저지 집으로 갔다.
우리 동네 Our Lady of Victory성당에서 부활성야 미사를 마치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을 오전 2시 30분에 맞추었다.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올라 출발한 시간이
오전 3시.
막내 민기를 만나러 Virginia Beach까지 갔다가
오늘 새벽 집에 도착한 시간이 새로 한 시 반이었으니
거의 만 하룻 동안 970마일을 달린, 짧지만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밖에 나오니
달무리가 보였다. 뿌연 달.
내가 가는 길의 동무가 될 것이다.
군복무 중인 막내 민기를 찾아가는 길이라 사진 찍을 일이 없으리라 짐작하 했지만
그래도 카메라를 챙겼다.
낯선 곳에 가면 색다른 풍경과 마주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달 사진 무심하게 한 장 찍었다.
그저 손을 푸는 일이다.
호흡을 고르고 살며시 셔터를 누르는 일.
서두르길 잘하고 허둥대는 성격인 내가
아무리 바쁘고 갈 길이 멀어도
숨고르기를 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그리고 군대에서 사격을 하면서 배운 것이다.
잠시 숨을 죽이는 일.
그래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메릴랜드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큰 아들 준기와 함께 가기로 하고
학교 앞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난 것이 6시 30 분.
비몽사몽 중에 어둠을 뚫고 네 시간을 달려 와 만난 아들.
매릴랜드에서 우리의 목적지인 Virginia Beach까지는
준기가 운전을 했다.
운전대를, 우리 모두의 안전과 생명을 아들에게 맡긴 셈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온전히 맡겨두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
우리는 그것을 믿음, 혹은 신뢰라고 한다.
누군가를 믿고, 누군가에게서 신뢰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은
진실로 살맛 나는 일이다.
이제부터 운전은 큰 아들에게 맡기고 나는 뒷좌석에서 눈을 감기도 하고
깜빡깜빡 졸기도 하면서 피로를 희석하려고 애썼다.
밤에 다시 돌아갈 길이 걱정이 되어서이다.
쌩떽쥐베리였던가?
"사람들은 앞으로 가는 일에만 열중하고 다시 돌아갈 길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던 이가.
95번 도로를 까라 남으로 내려가다 버지니아 중간을 넘으면서부터는
이렇게 편도 이차선 도로로 바뀐다.
도로 주위의 나무엔 어느새 잎들이 돋아나
겨울 동안 휑하니 비어 있던 여백을 제법 야멸차게
채워가고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처럼
색색의 나무꽃들이 피어 조화롭게 도열하듯 늘어선 길을
우리는 씩씩하게 지나갔다.
버지니아주의 거의 끝,
해군기지가 있는 Norfolk로 가기 위해선 이렇게 해저 터널을 지나야 한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 있는 길.
그 길이 다 했다고 해서 끝이 아닌 것이다.
그 곳(?)에 가겠다는 마음이 있을 때
길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길은 있는 것이다.
바다 밑으로도 길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길은 그렇게 앞으로 향하는 자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먼 길을 달렸다.
다리를 몇 개 건너고
바다 밑으로 난 터널도 몇을 지나 우리는 민기를 만났다.
Virginia Beach에 있는 Navy Music Academy.
Army와 Marine Corps도 여기서 교육을 받는다.
크리스마스 때 며칠 다니러 왔을 때 보고 거의 넉 달만에 보는 것이다.
음악 학교 안을 둘러 보았다.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바순을 연주해주었다.
그리고 렛슨 없이 독학으로 배운 색스폰 소리도
들려주었는데 음색이 아름다웠다.
시켜도 잘 하지 않던 민기가
자진해서 연주를 한 것은
멀리서 자기를 위해 온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형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Cheese Cake Factory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바닷가 구경을 가자고 했더니
자기 부대에도 비치가 있다고 해서 부대로 돌아갔다.
부대 끝 쪽으로 바다가 열려 있었고
정말 거기에 흰모래가 고운
한적한 비치가 있었다.
아직 철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어도
가족들끼리 평화로운 부활절 오후를 보내는 사랍들이 있었다.
어린 남자 아이 둘이 아직 물에 들어가긴 영 이른 철인데도
바닷 속에 몸을 담구었다.
아이들은 즐겁기만한데
내 몸에는 소름이 끼쳤다.
정작 찬 바닷물에 들어간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물 한 방울도 닿지 않은
내 몸에서는 소름이 돋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 먹음 때문이다.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 사라지고
너덜너덜한 사고를 가진 어른의 마음엔
물 한 방울 닿지 않아도 벌써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운 것이다.
해보지도 않고 미리 추워지는 내 사고, 내 나이.
기성의 깊은 늪.
젊은 시절에 그리도 경멸하던
기성의 늪에 그 누구보다고 깊숙히 빠져 있는 나를 보았다.
큰 아들 준기, 중간이 막내 민기, 그리고 아내.
엄마와 두 아들 간의 이야기.
민기의 복장이 자유롭다.
머리만 해병대원이지 복장은 저렇게 자유롭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상관에게 경례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 군복을 입고 공식적일 때만
상하관계가 생기는 것 같다.
벤치 위에 앉아서 우리끼리의
짧아도 유쾌한 수다가 파도소리를 반주 삼아
이어지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다리가 Chesapeake Bay bridge.
바다 위의 다리가 다시 해저 터널로 이어진다.
다시 다리가 되어 바다 위에 떠 있다가 다시
바닷속으로 그 길을 이어간다.
길이가 4.3 마일, 6.5Kn에 달한다.
누구일까?
저 허무한 바다에 길을 내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바다에 돛단배 한 척.
푸른 바다 흰 배.
육사의 시가 생가났다.
아직 7월이 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개도 주인 따라 바닷바람 쐬러 나왔다.
아들의 눈에 담긴 우리들.
'사랑하였으로 행복하였노라'
짧지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나이 들어가면서 추억의 소중함이 새삼스럽다.
추억이 모여서 우리의 삶이 되는 것이니
좋은 추억이 많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뜻일 것이다.
재물로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추억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다리 중간에 서서 한 장.
사진 찍히기가 두려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사진은 참으로 정직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세수하면서 매일 보는 얼굴은 그냥 그런데
사진에 찍힌 얼굴은 영 못마땅할 정도로 나이가 들어보인다.
사진기에 사물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기능이라도 있는 것 같다.
아들과 아내.
이 사진 정말 비싼 사진이다.
한 시간 반 하고 바꾸었으니 말이다.
이 다리가 Bay, 즉, 육지와 만의 끝 다른 쪽 끝을 연결되었으므로
육지쪽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가면 자동으로
집으로 가는 북쪽 방향으로 가는 도로로 연결되었다.
중간의 바다 때문에 꼼짝 없이
바다가 끝나는 지점까지 울며 겨자 먹기로 가야지 딴 도리가 없음을
어찌 알 수가 있었으랴.
바다를 가로 지르는 기쁨과 전률에 사로잡혀
우리가 어디로 가는 지 미쳐 챙길 겨를이 없었다.
.
세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비잉 돌아 거의 다섯 시간 걸려서야
아들이 사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버지니아 시골 구경은 신물 나게 했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렇게
차에 앉아 창문을 통해 사진을 찍었다.
멀리 등대도 보이고
북으로 향한 길 양 편엔 보리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다.
마음은 점점 급해지는데
중간에 하이웨이로 들어가는 길도 없고-----
그것 참, 인생이 이런 것이다.
한 쪽의 기쁨, 또 한 쪽의 실망을안고
살아가는 것, 그럿이 인생이다.
바다 저너머로 해가 떨어졌다.
창 밖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잠도 잘 못이루고
먼길을 갔다가 돌아오는 일.
행복하긴 해도 몸이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살아가는 일의 두 얼굴이다.
이해인 수녀님의 '행복의 얼굴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는 게 힘들다고
말 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말 한다고 해서
나에게 고통이 없다고 하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힘든 줄, 고통스런 줄 알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
가다보면 샘물처럼 솟는 기쁨을 만난다.
행복과 고통, 두 얼굴을 가진 길을 우리는 가고 있다.
그것이 삶이 아닐까.
'사진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날 일기 - 새벽 (0) | 2012.05.15 |
---|---|
봄날 사랑에 빠지다. (0) | 2012.05.01 |
Last Exit to Brooklyn (0) | 2012.03.07 |
내 마음에 서리 내린 날 (0) | 2011.12.19 |
우리집 늦가을 (0) | 2011.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