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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개천절-아버지 기일

10월 3 일은 아버지 기일.

두 시간이 넘게 걸려

집에 들어가서

동생네 식구와 연도를 바치고

성당에 가서 미사 드린 뒤에 부르클린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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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런 긴 밤이 끝나고

해가 날 무렵에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다.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


밤 새 고통스런 숨쉬기가 이어졌고

간호사는 가끔씩 아버지 병상에 들러

혈압을 재고 모르핀 주사를 놓았다.


처절한 고통이 이어지다가

아침이 되니

그 고통의 시간도 단절이 되었다.


마침 그날이 하늘이 열렸다는

개천절이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순간 

나도 깊은 숨을 몰아 쉬었다.


아버지가 열린 하늘로 오르신 것 같아

와중에 평화스런 마음이 내게 찾아 왔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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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좋은 때는 언제인가


따르릉따르릉따르릉

고단한 새벽잠을 깨우는 휴대 전화 벨 소리가 다급하게 잠결 속에 들려 왔다.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전화 벨 소리는 늘 긴장과 불안을 동반하곤 했다.

그날 새벽의 벨 소리에는 그 불안의 무게가 평소보다 더 깊고 무겁게 배어 있었다.

서둘러 전화를 받으니 동생의 젖은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 나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막상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가슴 한 켠이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동생이 서둘러 비행기 표를 구한 덕에 동생과 나는 그날 오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아버지에 관한 이런저런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빗발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5년 전 추석이었을 것이다전화로 부모님께 의례적인 명절 인사를 할 때였다.

아버지는 뜬금 없이 평소엔 괜찮은데 명절이면 많이 외롭다.”고 풀기 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늘 행동 하나말씀 한 마디 하실 때도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시던 아버지 입에서 그런 말씀이 나온 것은 의외였다.

하기야 평소엔 성당에서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시고,

레지오 마리에 같은 활동도 하시며 이웃이나 교우들과 어울릴 수 있지만 ,

명절이면 가족끼리 모이니 자식 셋을 다 미국으로 떠나보낸 우리 부모님은 외로운 섬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민 온지 사 반 세기가 되도록 부모님이 몇 차례 미국에 다녀가신 적은 있어도,

동생 결혼식을 빼고는 내가 부모님을 뵙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팔순을 바로 눈 앞에 둔 연세에 접어들어서 비행기를 타시는 것도 힘에 부치신 것 같았다.

이민의 고단한 삶을 핑계로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한 세월이 벌써 25년이나 되었다니,

어릴 적 술래가 되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출발선에 있던 아이들이 어느새 코 앞에 와 있는 걸 보았을 때처럼

시간이 야속하게도 빠르고 무정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시간은 그보다 빠르면 빨랐지 더 늦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부모님들의 몸과 정신에서 풀기를 빼며 흘러갈 것이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한 해에 한 번은 무조건 부모님을 찾아뵐 것을 결심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고 끊임 없이 흘러가기에 결심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듬해 초설에 부모님을 뵈러 한국에 갔다.

내가 도착한 다음날 오후에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보훈병원에 정기 진료를 받으러 가신다고 했다.

 오랜 만에 찾은 한국이다보니 해야 할 일 만날 사람도 많았지만 모든 걸 제쳐두고 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부모님이 사시는 경기도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분당까지 와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 타고 도착한 보훈 병원에서

아버지는 진료를 받으시고 처방을 받으셨다.

내가 모시고 가야할 텐데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평소에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가 가고 오는 길 내내 수다를 떠신다고 해야 맞을 정도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내 삶에 있어서 아버지와 둘이서 그렇게 긴 시간을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며 보낸 적이 있었을까? – 기억이 없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오후의 몇 시간은 겨울치고는 제법 따뜻했던 날씨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도 꺼내보면 훈훈해지는 앨범 속의 옛날 사진처럼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고 작년 10월 초에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인천 공항에 내려서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도착하니 오루 7시 반 가량 되었다.

아버지는 옆에 계시던 이모님과 외숙모님깨 우리가 언제 오냐고 몇 번이고 물으셨다고 했다.

말씀을 하실 수 없으니몸을 가누실 힘도 없으면서도  팔목을 가리키시며 그렇게 간절히 우리가 도착할 때를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나같이 무심한 자식도 자식이라고 언제나 애타게 기다리셨을 아버지 마음 한  자락을

임종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만지게 되었으니 늦은 것도 늦은 것이지만,

그 무심함의 죄값은 어떻게 치러야 할 지 몰랐다.

그날 밤은 말씀을 하실 수 없는 아버지 곁에서 내가 수다를 떨었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하셨지만 난 우리 아이들,

즉 당신의 손자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얼마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커 가고 있는지를 말씀드렸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썼던 편지(참 소중한 당신에 실렸던 눈을 치우며’ 라는 제목의 글)도 읽어 드렸다.

정작 그 글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글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때 까지 읽어보지 못하셨다.

나의 게으름 탓으로 미루고 미룬 탓에 몇 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나이 오십이 넘도록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사랑한다는 고백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다.

아버지 곁에서 눈을 뜨고 열 시간을 머물렀다.

그리고 많은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와 가장 긴 시간 동안가장 말을 많이 한 것이 하필이면 임종을 앞둔 때라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였다.

 사랑도 미루지 말고 지금 해야 함을 아버지는 말씀 대신 고통스런 숨소리로 들려주셨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사랑하기로 결심한다면 현재(Present)라는 시간이야말로 선물(Present)이라는사실을--------

그렇게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개천절 아침이 막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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