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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봄마중 가는 길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아무 길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길을 걷기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길 중의 하나가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알파인 트레일이다.

절벽 사이로 산길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허드슨 강 바로 옆길도 있는데

어디든 정감이 있다.

중간중간 작은 폭포도 있어서

걸으면서도 지루할 틈이 없다.


지난 주일엔 아침에 축구를 하고

아주 오랜 만에 교적이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성당에서 만난 동생과 커피를 마시며

지난 번 만났을 때부터의 시간을 요약해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트레킹할 곳으로 직행.

9W 길 옆에 차를 세웠다.

나보다 앞선 차가 예닐곱 되는데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겨울엔 볼 수 없는 풍경인데

날이 풀리자 콧바람도 쐬고

봄기운을 받으려 사람들이 제법 밖으로 많이 나온 것 같았다.


Palidaides Parkway 밑으로 난 터널을 지나며

나의 여정을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한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이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에 우리 성당 주임 신부로 계셨던 

안 신부님과 함께였는데 처음에

안 신부님은 무슨 까닭인지 그 터널 주변엔 

뱀이 많을 거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겁을 먹고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가 보지 않은 길을 가는 두려움 때문인지 

이 번에 처음으로 그 터널을 지날 마음을 먹었다.

(아직 뱀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로)




터널을 지난다는 것은 일종의 통과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 시간에서 저 시간으로

지나간다는 말이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내 안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터널을 지났다.


터널 안에는 어디서나

차들만 지나다니는 곳이 아니면 낙서가 있다.

깊숙한 내면의 드러냄.


욕망, 분노, 죄의식----

이런 것들.


내 안에도 분명히 그런 것들이 존재할 것이다.



터널을 지나 하늘을 보니

뭉게구름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한 자리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나의 걷는 일도 구름 같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아직 겨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낙엽들,

마른 풀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대지에서 파릇파릇 풀들이 돋고 있다.

마치 사춘기에 들어선 남자 아이의

코 주변에 까뭇까뭇 올라오는 수염처럼----


비로소 나도 봄을 생각하고

그리고 안도했다.



자작나무 잎인가?

마른 채 아직 가지에 붙어 있다.


가을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는데도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혼들.


세월호에 같혀 있는 이들의 영혼---


아픔이나 고통이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그런---







지난 주 내린 비때문에

가물적엔 마르는 개울에도

물이 흐른다.


돌돌돌---


아주 명랑한 소리를 내며

소풍을 가는 것 같다.



자작나무의 터진 살갗 사이로

버석들이 자라고 있다.




틈 새로 생명이 비집고 들어 가기도 하고

생명이 움트기도 한다.









아, 너였니?

고운 노래로 내 영혼을 씻어준 것이.


어린 시절

호르라기에 물을 넣어 불면

아주 고운 소리가 났지.


부럽다,

그리 고운 목소리와

노래로 공덕을 쌓는 네가.



잎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보이는

새들의 집.


내 육신을 훌훌 털고 나면 보일

내 존재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날엽 속에서 발견한 보랏빛 들꽃.

마치 잊고 있었던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한 느낌.


그래 네 이름을 환희라고 부를까?

아니면 희망이라고 부를까?



뿌리.


모든 나무의 뿌리는 빨갛다.

땅 속으로 파고 들기 위해

기를 써야 하니까.


실제로 술 속에 쓰러진 나무들을 보면

뿌리 사이에 커다란 돌덩이들도 있다.



돌틈 사이에 풀이 돋고 꽃이 피었다.

정말 꼬딱지 만한 흰 꽃 때문에

내 마음이 하얘진 것 같다.






폭포.

물의 양과 속도에 따라 소리도 다르다.



드디어 나타난 갈랫길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선택 앞에서 누가 자유로울까?


내가 선택한 길을 가면서도

가지 못한 길을 꿈꾸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나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다 좋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가기로 한다.


강물 소리를 듣고 싶어서

강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강 쪽으로 난 길을 접어들고

몇 걸음 떼지 않아

한 무더기 수선화 눈에 들어 왔다.


봄은 아주 낮은 데서부터 오고 있었다.


무명의 세계를 밝히는 밝은 등불 같은 꽃

이 길로 들어서길 참 잘했다.


수선화.


뜬금 없이 고등학교 시절

한 여학생 이름이 생각났다.

고동숙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여학생이었는데

내가 다니던 성당의 고등학생들을 위한

행사에서 '수선화'라는 제목의 가곡을 부른 기억이 난 것이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에 날개로---'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를 부른 그 여학생의 이름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계성여고를 다닌 그 여학생과는

말 한 마디 나눈 적도 없을 뿐더러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더 흐르고 난 뒤

수선화 꽃 이름을

'고동숙'이라고 부르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강 옆으로 난 길에서 만난 나무.

꽃잎인지 열매인지 목화처럼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강물이 가끔씩

돌에 부딪치는 소리가 둔하게 났다.


마음으로 듣지 않으면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강물도 소리가 없고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 와

잠자리에 누우니

그 제서야 강물 소리가 들렸다.



강 물 옆에

피어난 노란 꽃.


아마도 이 꽃은

한 세상 마치고 질 때가 되어서야

강물 소리를 듣게 될 것 같다.







강물 속에 뿌리를 내린 갈대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끊임 없이 흔들렸다.

간혹 바람이 불면

젖은 기침을 했다.


강은

갈대의 젖은 기침 소리로 내게 말을 건네는 건 아니었을까?



강 건너에서 기차 소리가 들렸다.

가끔씩 관광용 헬리콥터의 소음과

기차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내 귀를 공격하곤 한다.


새 소리 

강 물 소리는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들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한데-----

인공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왜 그리 귀에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냄새와 향기가 다르듯,

소리도 구별하는 단어가 있으면 좋겠다.



그 넓디 넓은 강에

오리 한 쌍


한 동안 구름처럼 이들을 바라 보았다.


비록 나란히는 아니더라도

둘은 늘 같은 방향으로 간다.

서로 마주 보는 일도 없이.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바라보는 것다.'라고 한 

쌩떽쥐베리의 말은

한 편 맞는 것 같으면서도 섬찟하다.


너무 이념적이고 신념적인 말 아닌가?

감정은 배제된----


사실 고등학교 때 쌩떽쥐베리에 매료되어서

지금까지 이 말에 경도되어 살았다.




강 가의 마른 잎.

강 물 소리를 듣고 있을까?

아니면 추억하고 있을까?


강물은 말이 없다.






벼랑을 오르기 위해서는

자작나무가 많이 쓰러져 뒹구는 곳을 지나야 한다.


마구 널부러진 공동묘지 같다.

속살은 썪고

껍질만 남은 뱀껍질 같기도 하고----

늘 오싹해진다.


다 마음이 연상작용을 일으켜 나타나는 망상이다.


일체유심조(切唯心造)


할!


서둘러 자리를 뜬다.





하늘과 구름이

강 물에 내려 앉았다.

물결이 흔들리며 만든 물무늬.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 또한 물의 모습이고

물의 모습이 아니기도 하다.



오솔길

새끼 손가락 반 만큼 찾아 온 봄.



걸어 올라야 할 벼랑.

숲 속에 길이 있다.

꼬불꼬불,

몇 번 숨을 고르고 오르면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니 땀이 난다.

수선화 한 무더기가 나를 맞는다.

아직 터지지 않은 꽃망울이 주는 긴장감.



물빛도

하늘과 구름 빛에 따라 쉬임 없이 변한다.

소멸과 생성.

그 긴 여정에 

나는 한 점,

혹은 나도 한 점이다.




가파른 벼랑에 뿌리를 내린

나무에도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다시 살아나는 생명 때문에

봄은 축복이다.






안 신부님이

앉아서 쉬 

너럭바위 주변엔 보랏 빛 꽃들이 무리를 이루어 피어 있다.


신부님은 거기서 '준주 성범'을 읽곤 하셨다.


 지극히 자애로우신 저의 하느님, 당신께 간구하오니, 

현세의 걱정을 면하게 하시어 너무 번잡하게 지내지 않게 하시고, 

육신의 많은 욕구를 피하게 하시어 쾌락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며, 

영혼의 모든 장애를 없게 해 주시어 괴로움으로 번민하지 않게 해 주소서. 

세상적인 허영심이 그토록 갈구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고, 

인류 보편적인 벌로써 당신 종의 영혼을 압박하고 영혼의 자유를 얻는 데 방해가 되는 

곤경으로부터 구해 달라고 청합니다. 


준주성범의 한 구절인데

나는 얼마나 신앙의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주변에 널린 보랏빛 꽃들을 보며

부끄러워졌다.


사순절을 지내는 빛이 바로 보라색이기 때문이다.

회개와 보속을 상징하는 보랏빛 꽃 무리.

무슨 색깔을 띄면서

나는 이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걸까?


아마도 부끄러운 얼굴의

붉은색일 것이다.



아 그리고 Snow Drop도 만났다.

땅에 엎드려 눈을 맞추면

드러나는 흰 꽃 잎 위의 하트 모양의 녹색 문신.


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온

사랑의 전령.


빨개진 얼굴이 다시 제 색으로 돌아 왔다.




마른 갈대를 배경으로

나무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폭포도 지나고---

이제 출발했던 곳에서 멀지 않다는 말이다.


다리가 무겁다.

새벽에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이다.

그리고 가만 생각을 해 보니 점심을 먹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다.





이 나무에 지자는 사람들이 새긴 낙서

누구에겐 장난이지만

누구에겐 아픔이 되기도 한다.




비 때문에 길 곳곳이 진창으로 변했다.


길에도

삶에도 진창은 있기 마련이다.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면

또 새로운 길이 생긴다.



이제 여정을 마칠 시간.


평소엔 두시간 반이 걸리는 길을

네 시간 반 동안 내내 걸었다.


마치 긴 영화를 본 것 같았다.

불이 꺼지면서 영화가 시작되고

벨 소리와 함께 불이 켜지며 영화가 끝이 난다.


저 터널을 지나며

여정이 시작되었고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와

터널을 지나면 나의 여정도 끝이 날 것이다.


술 속엔 수 많은 죽음이 있었다.

뿌리 채 뽑혀진 나무들 하며

낙엽들, 마른 풀.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꽃망울 떠뜨리는 키 작은 풀꽃들도 있었다.


소멸과 생성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자연 속에서 나는 여정을 마쳤다.


봄을 맞으러 길을 떠났지만

정작 나를 만나고 돌아 왔다.


길을 걸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나를 만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는 법이다.


터널을 지나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왔다.

내 앞에는 늘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고

나는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다시 나는 길 떠나는 꿈을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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