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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어쩌면 좋아요, 내 정신머리


어제 일요일 잠자리에 든 것은 오후 9시였다.


평소보다 이르게 잠자리에 든 것은

일요일 하루를 무척 분주하게 보냈기에

몸이 고단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이고

월요일 아침 출근 시간을 맞추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마님은 밥과 반찬을 준비해 놓을 테이니

아침에 출근하며 들고 가라는 말을 기억하며

아무 걱정도 없이 포근한 잠 으로 빠져 들었다.


알람은 자기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월요일 아침 5 시 기상.

나는 마님이 챙겨 둔 도시락 가방을 잊지 않고 챙겨 집을 나섰다.


문 밖을 나서니

싸늘한 공기가 나를 맞아 주었다.

하늘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가을엔 별들이 다른 때보다 더 맑게 빛이 나는 것 같다.


북두칠성과, 북극성,

그리고 카시오페아 자리가

어둠을 배경으로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추워진 날씨와 함께

또렷한 별빛은 내 머릿 속마저 맑게 씻어주는 것 같았다.


세탁소 문을 열고 얼마가 지났을까?

마님께 전화가 왔다.


"저기, 집에 쌀이 없어서 밥을 못 했어."


나는 호기롭게 말했다.

"걱정마, 내가 알아서 먹을테니."


속으로는

 "아니, 정신 줄은 어디 두고 사는 거야?"

"집에 쌀이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른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 거야?"

하며 투덜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 놀 수는 없었다.


도대체 도시락으로 무얼 준비했는지 궁금해서

가방을 열어 보니

비빔밥 재료와 함께 초고추장이 들어 있었다.


비빔밥 재료는 플라스틱 통 안에

아주 가지런하고 질서정연하게 들어 있었다.

비주얼로 보면 '갑'이었다.


밥이 없는 비빔밥 재료는 앙꼬 없는 찐빵이고

천덕꾸러기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5 분이 채 되지 않아

몇 가게 건너에서 야채가게를 하고 있는

막내 처제가 햇반 두 개를 들고 왔다.


역시 마님은 병도 주고 약까지 처방할 줄 아는

해결사의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그 사이 처제에게 전화를 걸어

햇반을 내게 가져다 주라고 지시를 한 모양이었다.

밥이 없는 걸 처제가

스스로 알아차렸을 이가 없지 않은가?


일단 점심 먹을 일은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드디어 점심 시간.


어라, 뭔가 좀 이상하다.

마이크로 웨이브 오븐에 1 분인가 2 분 동안

햇반을 덮여야 하는데

스위치를 작동시켰음에도

빙빙 돌아가야 할 쟁반 같은 것이 요지부동이다.


결국 전자 레인지는 고장이 난 것으로 판명되었다.

토요일까지 잘 작동 되던 것이

갑자기 고장이 난 것이었다.


밥이 없으니 비빔밥 재료만 먹을 수도 없는 법 아닌가?


그래, 밥이 없으면 라면을 끓여 먹으면 될 것을---


레인지에 몇 번 라면을 끓여 먹은 경험이 있으니

점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처제 가게로 뛰어 가 라면 한 개를 슬쩍 집어 왔다.


그릇에 물을 담아

레인지를 돌렸다.


그런데 레인지 안의 쟁반은 다시 요지부동.

문제는 밥이냐, 아니면 라면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리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레인지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그 사이 까맣게 잊은 것이다.


마님이 정신줄을 놓고 산다고 은근히 불평을 했는데

나는 아예 연체 동물 같은 뇌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살면서도

점심을 거르지 않은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이지 모르겠다.


이런 일들이 점차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난 금요일엔 자켓 두 개를 받았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사방을 뒤졌어도 찾지 못하다가

다음 날 아침에 찾았다.


마님은 늘 사용하는 안경이며 전화기를 어디 두었는지

자주 잊는다.

앞으로 이런 증세가 점점 나빠지면 나빠지지 

더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미약한 정신과 기억력 때문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자못 궁금하고 흥미롭기 까지 하다.


그래도 그리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는 것은

꿩 대신 닭이라는 말처럼

한 가지만 고집하지 않으면 

어떤 방법이 되었건 해결책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오늘도 밥이 없어서 

비빔밥은 못 먹었을지언정,

점심 식사를 거르지 않았음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시간이 지나며 더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어떤 식으로라도 일은 해결 될 것이고

문제를 해결 하는 동안 겪어야 할 마음 고생들은

점점 나빠지는 기억력 덕분(?)으로 

점점 더 쉽게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 잊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을 넘어

아름다운 곳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