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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그녀는 예뻤다 - 셋째 딸 선영이




아침부터 더웠고 하루 종일 바빴다.

세탁소에서 여름에 일을 한다는 것은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내내 일을 하면서 가끔씩

'저녁 식사로 무얼 먹어야 하나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들었다.

밥도 해 놓았고

아내가 월요일 아침 집을 나올 때

만들어 준 깻잎이며 질경이, 오이 무친 것들도 남아 있고

김도 있으니 한 깨 때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무얼 먹느냐 보다는 

또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하루 종일 세탁소 안에서 흘린 땀 때문에

끈적거리는 몸만큼이나 

마음도 끈적거리게 하는 것 같았다.

 

문 닫는 시간까지 10여분 남았을 때

갑자기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셋째 딸 선영이었다.

 

딸의 얼굴이 낯이 설었던 것은

그 시간에 세탁소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클린에 살고 있는 둘째라면

더운 날가끔 전화도 하고

불쑥 찾아올 확률이 있지만

선영이가 찾아온 것은 정말 뜻밖의 대박 사건이었다.

 

물론 셋째도 세탁소를 중심으로

거리로만 따지면 

둘째 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살고 있긴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그리 사근사근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 

자기 아이디어로 프로듀싱한 작품을 공연하기에

마지막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니 선영이의 등장은 

말 그대로 '서프라이즈'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피로는 슬그머니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같이 저녁을 먹을 동지가 나타났으니

고민 거리도 하나 없어지고 

거품까지 생긴 파김치가 다 되었다가  

고개 빳빳이 쳐든 푸른 빛의 싱싱한 파로 되돌아가는 듯 했다.

 

우리는 플러싱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짬뽕과 간짜장을 맛나게 먹었다.

 

돈을 내려고 하는데

바지 뒷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었다.

날이 더우니 지갑마저도 거추장스러워

일하면서 빼 놓고는 깜빡한 것이었다.

 

아빠와 저녁을 함께 먹어주기 위해 온 셋째가

저녁 값을 뒤집어 썼다.

그렇지만 선영이는 자기가 저녁 값을 내면서

기쁘고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빼 놓은 지갑 덕분에

모처럼 딸 아이에게 한 끼 얻어 먹은 것도 흐뭇한 일이지만

생각하지도 못한 딸 아이의 출현 때문에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오죽하면 딸 아이가 세탁소에 출현했을 때

Ezra Pound의 시가 생각났을까.

 

대학 때 외웠던 달랑 두 줄의 시 

'지하철 정거장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가 바로 문제의 시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Ezra Pound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3년 전에 파리의 지하철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어린아이의 얼굴

부인의 얼굴 등을 보면서 그 인상을 표현하려고 애썼으나 

그 신선한 감정을 나타낼 수 있을 만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중략

나는 30행의 시 한 편을 썼지만 그것을 찢어 버렸다

6개월 후에 그 반 정도의 시로 고쳤고, 1년 후에 2행의 짧은 시로 만들었다."

 

물에 젖어 검고 어두운 가지 위에

하얗게 피어난 하얀 꽃잎() 

바로 셋 째 딸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어둡고 긴 나뭇가지

그 위의 하얀 꽃잎을 보는 일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누군가도 갑자기 나타난 나의 얼굴을 보며

심신이 새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는 

흰 꽃잎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자리에 들려고 양치질을 하는데

또 셋째 선영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입에서 하얀 꽃잎들이 끝도 없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