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그렇게 보고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면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의 독창회에 다녀왔습니다. ‘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노래로 시작된 콘설트는
에피소드라는 주제로 그의 가수로서의 삶의 여정을 노래와 함께 하나 둘씩 꺼내 놓았습니다.
나도 누렇게 색이 바랜 내 젊은 시절의 일기장을 펼치는 마음으로 지난 세월을 열어보았습니다.
일기장 어디엔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꽂아 놓았던 코스모스의 하얀 꽃잎이나,
혹은 노란 은행잎을 발견했을 때처럼,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하면서 시간의 갈피 속에 묻혀있던 기억들이 모락모락 살아 나왔습니다.
어릴 적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약지 가운데 생긴 상처처럼,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쳐 살아온 기억 하나----
그러나 그때는 내 몸과 영혼이 온통 열병을 앓았던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이렇게 모든게 잊혀지나봅니다, 그때는 그렇게 아팠었는데------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그 숱한 간판처럼 그저 그런 에피소드의 하나였는지 그저 혼미할 뿐입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우연이라고 밖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3 학년, 아마도 오월 어느날이라고 기억됩니다.
참으로 우연히도 버스속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와 만났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우리는 고교생’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고,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차례였습니다.
패널로 참석한 여학생들이 그날의 주제인 ‘웃음’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 놓았는데 유난히 그녀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자석처럼 끌었습니다.
그녀는 웃음을 색깔 별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참 재치 있고 감각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카시아의 하얀 빛깔과 향기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몇 주 뒤 내가 활동했던 서클 후배 여학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그녀와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이었습니다.
후배 여학생에게 그녀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그때까지도 내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 참 신비로왔습니다.
후배 여학생은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라며 그녀에 관해 이것 저것 주워 담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아아 ,그 때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작은 싹이 돋아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뿐, 후배 여학생을 통해 가끔 안부를 주고 받기는 했어도
그녀가 E여대 영문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까지 서로 전화를 한 적도,
더군다나 만난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 하기 얼마 전, 후배 여학생의 주선으로 남산 자락 어디선가에서 만났습니다. 이 월 말쯤이었을 겁니다.
햇볓은 막 봄의 기운을 띄기는 했어도 꽃샘바람이 유난히도 봄의 기운을 질투하듯 제법 위세를 떨치는 날이었습니다.
‘학선오빠?’하면서 다가오는 그녀의 치열 고른 이 사이로 아카시아처럼 하얀 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이월 말에 아카시아의 하얀 빛깔과 향기로 다가온 그녀는 마치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평안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남산 순환도로를 걸으며 나누었던 숱한 이야기는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 갔고
지금의 내 기억의 창고는 텅 비어 있을 따름입니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 어디쯤이긴 했지만, 그날 내 마음 속엔 벌써 봄이 왔습니다.
우리가 걸었던 남산순환 도로엔 내내 아카시아 향기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아카시아의 하얀 빛과 향기로 내 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월, 아카시아 향기가 유난히 흐드러지게 퍼지던 그 해 오월에
내가 다니던 대학축제에 그녀를 초대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시를 낭송했던 시낭송회와 시화전에도 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축제 마지막 날, camp fire가 사위어 갈 때까지 스탠드 제일 꼭대기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지금은 아카시아의 향기만 기억 속에서 솔솔 흘러 나올 뿐입니다.
밤이 깊어 가면서 밤공기가 제법 선선해지자 나는 내가 입었던 jean jacket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며,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에 내 팔을 둘렀습니다.
그녀를 따스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체온이 그녀에게 전달 되기도 전에, 그녀의 체온으로 내가 오히려 따뜻해짐을 느꼈습니다.
사랑으로 상대를 따뜻하게 해주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내 몸과 맘이 먼저 따사로와지는 것-------그것이 사랑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한 두 번 더 그녀를 만났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음악다방에서 만난 그녀는 Rod Stewart의 'Sailing'이라는 노래를 신청해 들려 주었습니다.
그날 나는 그녀와 같이 삶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면 참 따뜻하고 행복할 것 같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난 그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날 그녀는 그녀만의 항해를 꿈꾸고 있었는 지 모릅니다.
그 해, 유난히도 무덥던 여름 한 철을 내 스무살의 몸과 영혼은 온통 열병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항로로 나는 나의 항로로 삶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얼마 만큼의 거리에 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의 공간과 시간을 항해했습니다.
그렇게 무심하게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열어본 내 기억의 갈피 속에 묻혀 있었던 내 스무 살의 아픔이
그저 내 몸에 숱하게 박혀 있는 작은 점들 중 하나처럼 그저 무심하게 느껴집니다.
내 스무 살의 여름을 뒤흔들었던 그 아픔도 세월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작은 상처만 남아서 그저 무심하게 일기장 속에 꽂아 놓았던 마른 꽃잎처럼
그해 여름의 기억을 되살려 줄 뿐입니다.
이젠 그녀의 얼굴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아카시아를 닮았던 하얀 미소만 어렴풋할 따름입니다. .
그런데 이 가을 이리도 가슴이 허허로와지는 건 또 왜일까요?
아팠던 그녀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랑도 아픔도 잊혀지고
그 모든 것이 나로부터 하나씩 둘 씩 멀어져 간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아, 삼십 년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습니다.
오늘 이 무심한 가을 바람에 어디선가로부터 싸아한 밤꽃 향기가 묻어오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