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하늘이 낮게 가라 앉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후 늦게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부터 내리던 눈은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 볼 때까지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바깥 세상은 그야말로 동화속 세상입니다. 그리고 평등하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이민 와서, 더군다나 시내에서 좀 떨어진 교외로 이사를 한 후로는 눈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제 직장이 있는 브루클린까지 50 Km 남짓 운전을 해서 출근을 하는 일이며,
한 없이 느려터진 차량들의 꼬리를 물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또 얼마나 더디고 지리하며 긴장되는지 모릅니다.
일터에서 출발할 때 듣기 시작한 노래 CD를 바꿀 여유도 없이,
운전대를 꼭 부여 잡고 같은 노래를 세 번씩이나 꼬박 들어야 할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집 drive way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무는 쌓이는 눈의 두께에 비례해서 더욱 더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마침 주일이기에 일터로 가야하는 부담이 없어서인지 오랜 만에 창 밖에 내리는 눈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제 생각은 날개를 달고 시간을 거슬러 이리 저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30여년 전, 우리집에 연탄 보일러가 있었는데 연탄을 갈고 연탄재를 치우는 등의 모든 일이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집 밖에 보일러가 있었기에 눈이 오거나 얼음이 꽁꽁 어는 날 새벽에
가스를 마셔가며 연탄을 갈고 재를 치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 내리는 창 너머의 풍경으로 비쳐집니다.
잔뜩 웅크린 모습입니다.
아버지 곁엔 아무도 없습니다.
차가운 겨울 날씨에 나는 아마도 따뜻한 구들장을 지고 한껏 게으름을 즐기고 있었을 테니까요.
나는 겨울 내내 집 안에서 추위를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음의 연유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런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당연히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셨습니다.
몇 해 전, 지금은 대학생이 된 큰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1월의 어느 주일 아침도 오늘처럼 그렇게 눈이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밤 새 내린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 중간까지는 족히 쌓여 있음직 했습니다
그 많은 눈을 치우기에는 내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겠다는 생각에 심적으로는 적잖은 부담이 되긴 했어도,
코 밑에 수염이 까뭇까뭇 자라기 시작한 큰 아들 때문에 제법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눈이 그치고 제설작업을 시작하려고 눈삽을 챙기며 아들을 찾으니,
아들은 옷을 다 챙겨 입고 모자에 장갑까지 낀 채로 어느새 눈삽까지 챙겨서 어깨에 메고 있었습니다.
총 대신에 눈삽을 멘 아들의 모습은 군장 검사를 마치고 출전 준비를 끝낸 군인처럼 늠름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빠를 도와 눈을 치우려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스럽던지요.
아들 키운 보람이 있다는 말은 꼭 이런 경우를 두고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운 좋은 생각은 잠깐이었고, 모든 흐뭇했던 감정들이 산산 조각나며 눈속으로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큰 아들 녀석은 친구들과 같이 다른 집 눈을 치우기로 약속이 다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휑하니 떠나가는 아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맥이 쭈욱 빠졌습니다.
그 넓은 driveway를 혼자 치워야 한다는, 가장의 비애라면 너무 신파조가 되는지 몰라도 하여간 비장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래 할 수 있어, 내 혼자 하고 말고-----“ 뭐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격려해가며 눈삽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30 여년 전 아버지는 새벽에 혼자 일어나셔서 매선 바람과 연탄가스를 마시며 연탄을 가셨습니다.
몸이 편찮으실 때에도 아무 말씀도 없이 마치 그 일이 자신의 운명이기나 한 것처럼, 아니면 신앙이나 되는 것처럼 그 일을 하셨습니다.
혼자 눈을 치우며, 아빠를 돌아보지도 않고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던 아들의 뒷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혼자 연탄불을 가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몸살로 몸이 불편하실 때, 이젠 지금의 제 아들 나이 또래였던 큰 아들이 대신 연탄불을 갈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왜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그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저는 연탄불 한 번 갈아본 일이 없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오고, 이민와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제 아들이 콧수염이 나기 시작한 그제서야 아버지 마음의 한 자락을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속옷은 물론 겉에 입은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을 쏟은 후에야 driveway가 훤해졌습니다.
점심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야 큰 아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눈을 치워서 번 돈 50불을 무슨 전리품이나 되는 것처럼 제 눈 앞에 자랑스럽게 펼쳐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마음과 내 마음의 거리를 채우기라도 하듯이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30년 쯤 뒤에 나의 마음과 큰 아들의 마음을 이어줄 흰 눈이 평등하게 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