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http://blog.daum.net/hakseonkim1561/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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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오고 말았다.
아니,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 토요일 아내가 엽서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순간 내 얼굴이 붉어졌다.
아내에게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내 마음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엽서는 내가 한국에 갔을 때
남쪽 바다 끝,
통영의 중앙 우체국에서 부친 것이었다.
처음 계획은 아주 순수하고 낭만적인 의도로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끝나는 유치환 시인을 흉내 내어
아내에게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적어 보내려는 것이 나의 의도였다.
청마는 이 곳에서 연인 이영도 시인에게
연서를 써서 부쳤다는 이야기는 이미 너무 유명해져서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먼 타지에서
나만의 특별한 고백을 아내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창구의 여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엽서가 있나요?"
나를 흘긋 다시 한번 보더니
직원은 설합을 한 두 개 뒤지더니 엽서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 표정엔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가격이 200원이었던가, 300원이었던가----
기억이 확실하지가 않지만
너무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어서 놀랐다.
25센트도 채 되지 않는 가격에 적지 않게 실망이 되었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인지
직원도 엽서를 둔 위치를 기억해 내는데 잠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이 엽서가 미국까지도 가나요?"
창구 직원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이런 질문은 처음 받는 것임이 틀림이 없었다.
그 여직원은 선임인 듯 한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더니
"네 간답니다."
라고 제법 자긍심 그득 담긴 어조로
반신반의하고 있던 내게 답을 돌려주었다.
그런데 그 싼 엽서 값이 문제였다.
경험 많은 선임 직원의 유권해석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설마, 이게 미국까지 갈까?-
내 마음의 추는 이미 의심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니
아내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의 고백을 엽서에 실어
미국으로 보내려던 마음은 봄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고,
'어디 정말 가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랑의 마음보다는 판단하는 마음,
테스트하려는 마음으로 대충 엽서 한 두 줄을 메꾸고 멈추었다.
어차피 아내의 손에 닿지 않을 걸
뭐 그리 마음을 모아 빈칸을 메꿀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오지 말았어야 할,
와서는 안 될 엽서가 내가 한국을 떠나고
두 주가 지나서
내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떡하니 아내 손에 쥐어진 것이다.
200원인가 300원짜리 엽서는
태평양을 건너서 3 주일쯤 걸리는 고단한 여정 끝에
우리 집에 도착했다.
25 쎈트 엽서 한 장의 무게 보다도 가벼운
내 마음, 내 사랑, 내 정성.
살아오면서
마음을 다 하지 못하고
정성을 다 하지 못하고
사랑을 다 하지 못한 것이 어디 이 번뿐이랴.
내 생각과 내 판단이 옳다고 믿으며
순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피워내지 못한 삶의 꽃 봉오리는 또 얼마나 될 것인지.
창구 직원의 말을 그대로 믿었어야 했다.
300원짜리 우편엽서의 가치를 인정했어야 했다.
누가 알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참회하고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면
언제고 그 엽서 한 장이
백만 송이 흰 장미 꽃봉오리가 되어 향기를 풍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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