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묵호라는 제목은
사실 잘못 되었다.
애초에 묵호는 내 방문 계획 속에 없었다.
순전히 지인이 나에게 많이 선심을 써준 덕분에
속초를 찍고.
묵호라는 곳을 난생 처음으로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묵호는 내게 속초보다는
덜 변형된 어촌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드디어'라는 말을
기어코 집어넣은 것이다.
우리는 속초를 떠나와 남쪽으로 달렸다.
남으로 가는 도중 몇 몇 바닷가에 들려서
겨울바다의 바람을 원없이 들여마셨다.
오존의 상쾌함.
설알산 입구인가 보다.
이곳 설악산에 언젠가 한 번은 오르고 싶은데----
길을 가다 보니 양양군 간판이 나왔다.
내가 양양 땅을 밟은 적은 없어도
나랑 같이 축구를 하는 지인이 이곳 출신이라
간판을 보니괜히 반가왔다.
살아가는 일이 이런 식이다.
모르는 곳, 낯선 사람이라도
나와 관계 있는 사람과 연결 고리가 있으면
이유를 꼭 집어 말할 순 없어도
괜히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런 것 말이다.
이곳의 양송이가 유명하다는 것도
그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지나면서 몇 군데 양송이가 들어간 간판을 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부두에 닿았다.
지인은 내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그건 날 잘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친절하지 않아서라기 보다
내가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눤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나 관심도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되어져야 함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다.
바다에서 돌아온 후에도
어부의 손은 바쁘다.
내일 또 바다에 나가야 하기에
그물 손질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횟집 열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다 그놈이 그놈 같다.
단지 상호가 다르다.
상호를 보고 고르라면 어딜 고를까?
'잉꼬부부 횟집'.
아니면 '어민 후계자'집
선택하는 일은 늘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차창에 비친 바닷가 풍경
드디어 묵호.
한 두 블락 양 옆으로 늘어선 가게를 지나니
싱겁게도 바로 바다가 보이는 곳
묵호에 도착.
묵호는 어딘지 슬픈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깨어진 콘크리트.
글씨도 잘 알아볼 수 없도록 지워지고 벗겨진 페인트.
묵호는 그렇게 세련되지 못한 곳이었다.
속초보다는 좀 더 순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어민들도
그물을 손보고 있었다.
매일 매만져야 하는 그물이
그들에게는 천형 같은 것일까,
아니면 반갑고 고마운 존재일까?
아주 작은 장터엔 온갖 생선들이 넘쳤다.
건물이나 사람들보다는
생선에서 훨씬 더 활기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묵호였다.
아주 작은 어시장엔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
시장에서 게나 문어를 사면
옆에 있는 식당 같은 곳에서
삶아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생선 회도 처주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
어부보다도 이 삶들이 돈을 더 버는 것 같다고
지인은 말했다.
문어가 물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신기했던지
이 아이는 한참을 넋을 놓고 구경을 했다.
한 소쿠리 가득 담긴 생선이
만원,
그래 맞다, 이럴때 단돈 만원이라고 해야
더 어울린다.
손질까지 끝난 생선 한 소쿠리가 만원이라는 소리에
어부들의 고단한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나왔다.
상인은 소쿠리에 있던 생선에
두 마리를 더 얹어주었다.
흔히 말하는 장터 인심이다.
두 마리 더 준 생선 때문에 그만큼 더 슬펐다.
난생 처음 보는 생선인데
곰치라고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식당에서
곰치국 같은 걸 파는 것 같았다.
맛이 어떨까- 아주 궁금했다.
어느 아담한 키의 남자가
자기가 오늘 아침 잡아온 생선을 판다고 해서
그의 배로 갔다.
작은 세숫대야 하나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의 가자미가 담겨 있었다.
이틀 동안 눈 때문에 조업을 하지 못하고
그날 나가서 잡은 것이 그게 다란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가자미가
그 어부와 또 그의 아내를 닮았다.
바닷바람 한 주먹이 내 코를 비집고 들어왔다.
비릿한 바닷 내음.
거기엔 생선 냄새와 더불어
어부들의 땀 냄새도 녹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부두에서 맡는 바다 내음엔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도 묻어 있을 것 같다.
쉴틈 없이 움직이는 어부의 손길.
부둣가를 돌아 어느 골목에 이르렀다.
담장 너머 빨랫줄엔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마른 빨래에는
바다배음이 베어 있을 것 같다.
지인의 단골 횟집.
푸른 바다의 색으로 도배를 했다.
바닷가에 왔으니 회 한 접시 먹자고 해서 찾은 것이다.
제철 회로 쭈꾸미 회무침과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새콤 달콤한 양념에 어우러진 쭈꾸미 회무침은
더할 나위 없이 싱싱했다.
반 이상을 야채로 채운 도시의 회무침에 비해
이 곳의 쭈꾸미 회무침은
오히려 야채 구경하기가 더 어려웠다.
쭈꾸미가 거의 자리한 접시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만 사 천원.
우리가 먹고 낸 돈의 액수 때문에
많이 슬펐다.
어린 시절 보았던 난로의 연통이며
'쌍방울 마차' 같이 세련과는 무관한 간판이
내 기억의 시간을 오십년 쯤 뒤로 돌려 놓았다.
생선을 걸어 말리는 것은
어촌에서는 아주 낯익은 풍경이다.
영업을 하는 곳도 예외는 아니다.
가게 앞에 개 대신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으면
그럭듯한 풍경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돌아오는 길
몇 개의 터널을 지났다.
나를 위해 꼬박 하루 분량의 자신을 희생한 지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진정한 사랑은 금전을 내어 놓는 것보다
이렇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신앙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속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이웃들을 생각해 보았다.
나를 숨 쉬게 하고
살찌워 가게 하는 건 아무래도
나랑 제일 가까운 아내를 비롯한 이웃들의 헌신이다.
새벽 네 시에 시작한 속초 여행은
묵호를 마지막 행선지로
끝을 맺었다.
하룻 동안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