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 일요일 오전 12시 출발.
아내 마리아와 나는
동네 성당에서 7시 30분 미사를 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사실 내가 준비하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아내가 모든 것 다 해주었다.
그래도 한국에 도착해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해야하는 것이다.
어머니 집 들어가는 문의 번호부터 숙지를 해야 했다.
이런 것들이 이젠 다 내 뇌에 부담이 된다.
물론 외우지 못하고 동생에게
멧세지로 보내라고 해서 전화기에 일단 저장을 해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국의 인사들과의 접선은
공항 라운지에서 인터넷을 이용해 하려고
노트북을 챙겼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고 비행사 라운지에 들어서니
아직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려고
노트북을 꺼내 켰는데
부팅이 되질 않았다.
전원을 켜고 끄는 걸 몇 차례 해보았지만
전날까지 멀쩡하던 콤퓨터가
내 머리처럼 맹해진 것이었다.
이것 참 처음부터 낭패를 만났다.
어쩌랴, 하릴없이 결코 가볍지 않은 노트북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비행기에 올랐다.
A 380이었다.
에어버스, 프랑스에서 만든 2층으로 된 큰 비행기였다.
3년 전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과 함께 탔던 그 비행기였다.
동생 설명으로 난 이미 A380과는 구면인 셈이었다.
내 자리가 있는 2층만 해도
초등학교 교실 너덧 개를 이어놈직한 크기였다.
작은 비행기만 타다가
제법 큰 비행기를 타니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좋은 경치를 만나면 사진을 찍기 위해
check-in할 때 창가 자리를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좌석 옆과 창 사이에도 얼마간 공간이 있어서
내 운신의 폭은 더 늘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곳곳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내 자리 바로 옆도 비었고
통로 자리에 웨이브가 약간 진 단발머리 청년이 앉았다.
라운지에서 전화기로 우리가 타고갈 비행기를 찍던 청년이었다.
비행기 문을 닫는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오면서
자연히 나와 그 청년 사이의 빈 자리는
우리 둘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 소유 구역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서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항공사의 불행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경우였다.
나도 낯을 가리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젠 그 긴 시간을 잘 들리지도 않는
앞 좌석의 모니터만 처다보고
열 네시간을 가기보다는
청년과 친구를 맺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은 내가 먼저 깼다.(ICE BREAKING)
청년은 Astoria에 살면서
맨하탄 미드타운에 있는 미국회사에서
컴퓨터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잇는 카메라를 보더니
자기 카메라는 5d mark 2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두 남자의 수다는
간간히 이어졌다.
내가 이 비행기에 대해 아는 체를 했더니
청년은 자기 어머니가 Air Bus에서 일하다가 은퇴를 했다고 하며
어머니가 아주 자부심이 많다고 했다.
참고로 에어버스는 프랑스에서 제조되는 비행기이다.
그 청년은 중서부 프랑스 출신이었다.
아들이 탈 지도 모르는 비행기를
어머니의 마음으로 만드는 일을 하면
세상의 사건사고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처음엔 이 청년이 드링크를 주문하는데
맥주를 마셨다..
내리 세 캔을 마시기에 이거 알콜 중독자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는데
나중에 보니 잠을 자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었다.
한 차례 식사 시간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 청년이 컴퓨터 전문가라는 데
내 생각이 미쳤다.
아무리 두뇌 회전이 느려도 가끔은 제대로 작동을 한다.
슬며시 노트북을 꺼내
청년에게 내밀었다.
청년은 몇 번 이리저리 뭔 키를 누르고 어쩌고 하더니
콤퓨터를 내게 돌려 주었다.
이젠 괜찮을 거라고 하면서.
그것참, 신통했다.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었던 노트북이 다시 생명을 얻어서
한국 체류기간 동안 내 소통의 도구가 되어줄 수 있기에
그 청년에 대한 고마움은 아무리 표시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시간이 나면 청년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밥 한끼 정성스레 대접해주고 싶었다.
우린 헤어지면서
사진을 올리는 site인 flickr를 통해 연락하자며 주소를 교환했다.
그 청년은 'big에다가 숫자가 들어 간 아이디를 알려주었는데
big만 기억나고 숫자가 기억나지 않았다.
내 아이디를 알려주었는데
청년은 자기 전화기에 기록을 하고
호텔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나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flickr에 들어가 보니
청년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 아이디가 청년에게 가르쳐 준 것과 달랐다.
아무 신경 쓰지 않고 당연히 내가 가르쳐 준아이디가
절대적으로 맞는대고 생각했느데 그게 아니었다.
결국 난 실없는 사람이 되었고
따라서그 청년에게
보은을 할 기회도 영영 놓치고 말았다.
그냥 날 스치고 지난 인연이고
단지 해프닝일 따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엔
상대에게 깊은 실망감과 배신감을 남겨줄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부주의나 무심함을
시차 때문에 깨어난 한국 방문 첫날에
거듭 반성하고 또 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잃어버린 기억의 복원 (0) | 2015.01.28 |
---|---|
아버지의 위스키 (0) | 2015.01.27 |
스페인 (0) | 2015.01.09 |
감기 진압 작전 (0) | 2015.01.05 |
2014 12. 31(감기) (0) | 2015.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