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증세를 보인 지
만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3-4일 간은 더의 밥잠을 자지 못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 쪽잠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코가 막히고, 콧물이 흐르며, 목구멍을 할퀴듯 기침을 해댔다.
이 정도 고통을 일 주일 동안 성실히 받았으면
보통 슬그머니 꼬리를 보이며 사라지곤 하는 게
내게 찾아오는 감기의 전형적인 스타일인데
이번엔 다른 부류의 감기가 찾아온 것인지
도대체 떠나갈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일하는 내내 기침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먹구를 처럼 머릿 속을 떠돌던 두통의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 날 밤잠을 설쳤음에도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하루 내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묵은 손님 떠나간 줄 알았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고운 목소리 빼곤 80%는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모처럼 편안하게 주말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희망을 갖고 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누가 그랬던가, 자만이 독이 된다고.
집에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낮 동안 잠잠하던 기침이
버젓이 고갤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감기란 놈이 전면전 뿐 아니라 게릴라 전에도 능통하다는 걸
이번 감기로 절실하게 깨달았다.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모임에도 가질 못했다.
집에 도착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꿀물도 한 잔 해서 목을 부드럽게 한 뒤에
정성스런 몸기짐을 하고 자리에 누웠다.
잠자리에 들고 얼마되지 않아
난 잠에 곯아 떨어졌다.
얼마를 잤을까?
게릴라 전이 막 시작되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목이 간지럽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간을 보니 밤 열 두 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앞으로 치루어야할 야간 전투를 생각해보니
난 이미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감기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길 수 없으면 견디어라,
견딜 수 없으면 즐겨라.'
누가 이따위 말을 지어냐 혹세무민을 했던가.
일방적으로 난타를 당하고 기잔맥진한 뒤 다시 잠이 들었으나
게릴라들은 내 사정이란 건 쥐 눈꼽 만큼도 봐주질 않았다.
다시 일어나 전의를 가다듬었다.
다시 꿀물 한 잔으로 심신을 무장했으나
적의 세력은 이미 승리를 예감이나 한 듯이
더욱 드세게 날 몰아쳤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나니
아침이 찾아왔다.
그리움이나 마음의 고통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니 어쩌니 하는 사랑노래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나처럼 이렇게 아팧단 말이지?'
아침 미사에 다녀와서 잠시 자리에 누웠다.
아직 남아 있는 감기의 잔당들은
누워 있는 나에게 다시금 좋은 먹잇감을 만난 맹수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원군을 청해야만 내가 존립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글을 마치고 나면 난 약을 사러 나갈 것이다.
약의 도움으로 내 몸은 어는 정도 추스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약의 도움 없이 한 주일 앓고 나면 회복이 되어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번엔 스토리가 영 달라진 것이다.
감기도 오래 되면 폐렴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노인다운 두려움과
며칠 안 남은 스페인 여행 때문이라도
빨리 이 감기를 털어버려야 한다.
일행에게 민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을 사러 나가는 마음이 못내 슬프고 비장하기만 하다.
더 이상 약의 도움 없이 감기에 대적해 싸우기엔
이미 내 기력이 약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치 백기를 들고 적에게 항복하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약을 사러 집 문을 나서는 순간,
난 레테의 강을 건너는 것이다.
감기에 맨 몸으로 맞서던 빛나는 청춘의 시간들이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한 번 약을 사러 집 밖을 나서면
난 청춘으로서는 다시 우리집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감기가 찾아오면 지레 겁을 먹고
꼬박꼬박 비굴하게 약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빛나는 청춘과는
영영 이별해야된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감기약을 사러 나가는 나의 발길이
자꾸 주저주저 미적미적거리는 까닭이다.
감기약을 사들고
난 노인이 되어 우리집 문을 힘없이 밀고 들어올 것이다.
안녕 내 청춘의 마지막 손님, 감기,
안녕, 내 순수한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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