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셋째 선영이에게서였다.
선영이가 나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다.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전화를 한다.
월요일의 그 귀하신 전화도 예외 없이 부탁을 하는 전화였다.
그러나 부탁의 종류가 평소와는 좀 달랐다.
'"아빠, 방송국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편지글을 읽는 사람이 필요한데 아빠가 해 줄 수 있어?"
셋째의 부탁은 거절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해 줄 수 있냐는 완곡 어법으로 한 부탁의 말이지만
나는 해야만 되는 강한 의무로 듣어야 하는 것이다.
그건 어릴 적부터 늘 그래왔다.
쓸 데없는 부탁이나 실현 불가능한 부탁은 하지 않는 아이인데다가
난 그 아이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연유는 길고도 심오하기에 기회가 되면 공개한기로 한다.)
"물론이지."
좀 걱정이 되긴 했다.
18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듣는 제법 인기가 있는 방송인데다가
혹 실수라도 해서 딸 아이에게 누가 될까봐서였다.
영어와 한국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책임 프로듀서가 보낸 이메일을 받고
딸아이는 바로 자기 아빠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다른 누구보다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인정 받는 다는 사실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희죽거릴만큼 기분이 좋은 일이다.
목소리 좋다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무덤덤할 정도가 되었다.
뉴욕 가톨릭 방송을 하면서도
내 목소리에 감동을 받았다는 간증을 직간접으로 들었던 터라
한국어로 읽는 것은 은근 자신이 있었지만
영어가 문제였다.
텍스트를 이메일로 받고 보니 그닥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native speaker처럼은 아니더라도
이민 1세치곤 발음이 괜찮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터라
A급은 아니어도 B급 정도로 미션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흔쾌히 딸아이의 부탁을 수락했다.
딸아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아빠의 마음이 전부였다.
월요일 오후는 영어 편지를 읽는 연습으로 시간을 다 썼다.
저녁 때 집에 돌아가 큰 딸에게 시험을 보았다.
한 가지 지적을 받았다.
두번 째 음절에 엑센트가 있는 단어를
천번 째 음절에 액센트를 주어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빼고는 'Good'이라는 채점결과를 받았다.
큰 딸 아이는 마음이 둥그니
채점도 그리 짜게 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말 잘 읽은 것은 아니어도
아빠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다음날 서둘러 일을 마치고
5시 20분 쯤 방송국 앞에서 선영이를 만나기로 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C 트레인을 타고 Spring에서 내렸다.
살짝 비가 내려서 길이 젖어 있었고
신호등의 불빛과 차량들의 불빛들이 반사되어
길들이 어지럽게 빛이 났다.
아닌게 아니라 퇴근 시간 홀랜드 터널로 향하는 차량들로
도로는 주차장 그 자체였다.
방송국이 있는 건물은 지하철 역에서 서너 블락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슬금슬금 내리는 비와 친구하며 걸었다.
방송국 앞에 가니
선영이가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증을 받아들고 방송국이 있는 곳으로 올라 갔다.
선영이가 물었다.
"아빠, 읽는 연습 할래?"
난 그러마라고 했다.
큰 딸의 채점 방식과 셋째 딸의 심사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선영이라면 좀 더 세부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적을 할 것이기에 그러자고 했다.
빈 방에서 한 두 번 읽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너 가지 지적 사항이 나왔다.
몇 번 연습했더니
선영이가 'much better!'이라고 했다.
내 마음도 좀 더 가벼워졌다.
프로듀서 Matt과 인사를 하고
얼마 뒤 녹음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방송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단지 저녁이라 목소리가 좀 가라 앉기 했으나
나만 느낄 정도였다.
NG 없이 오분 여 만에 녹음은 끝이 났다.
선영이는 내가 녹음을 하는 동안 사진을 찍었다.
아빠에게 그걸 선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Matt의 말로는 내가 읽은 편지가
방송으로 나갈 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몇 가지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방송 시간 때문에
소위 통편집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방송이 된다면 크리스 마스때 쯤일 거란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빠를 추천한 딸 아이의 인정을 얻었으므로
내가 받을 건 다 받은 셈이었다.
내 목소리가 방송에 나가지 않아도
난 이미 큰 상을 받아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린 방송국을 나와 빗길을 걸어 몇 블락 떨어진 곳에 있는
스패니쉬 레스토랑으로 갔다.
뭐라드라 (내내 이름을 못 외울 것이다)
조금씩 맛 볼 수 있는 것으로
네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우리가 어릴 적 '고로께'라고 하던
감자가 든 음식과 오렌지와 실란트로를 위에 얹은 스칼롶,
구운 마늘이 섞인 새우와
그 소스에 찍어먹으라고 함께 나온 빵,
그리고 스테이크를 먹었다.
구운 감자와 꽈리 고추의 맛은 일품이었다.
디저트는 또 다른 데 가서 먹자고 내가 제안을 해서
소호까지 밤비 내리는 길을
선영이와 걸었다.
작은 우산 하나를 둘이 나누어 쓰고 걷는
밤길이 호젓하고 정겨웠다.
선영이와 이렇게 둘이서만 데이트 한 것이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선영이는 중간에 멋 있는 곳이 있다고 하며
어느 호텔로 안내 했다.
불빛이 반짝이는 그 곳은 작고 예뻤다.
아빠 사진 한 장 찍으라고 해서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Gene Kelly의 'Singing in the Rain'을 흉내 내어 포즈를 취했다.
비는 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한 손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딸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전철역까지 걸었다.
딸과 함께 있다는 어떤 따스한 기분이
우리가 쓴 우산 아래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린 헤어져 서로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로 향했다.
선영이와 함께 했던 세 시간 동안 참 행복했다.
자칫 이런 행복을 맛 볼 수 없었을 수도 있었는데
예쁘게 자라 내게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는 선영이.
비 내리던 그 세시간 동안
난 계속 비를 맞으면서도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날 사랑해줄 사람이 있다면
비가 무슨 대수일까.
우산도 없이
빗 속에서 비를 맞으며
노래 불러도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선영이와 함께 했던
화요일,
그 세 시간.
읽는 연습
스튜디오 안에서 녹음 중.
이 방송국 초창기 주조정실 창문
WQXR(뉴욕의 단 하나 뿐인 클래식 FM)
내가 늘 듣는 방송의 CD Library.
선영이는 이 방송국에서 인턴을 얼마 동안 했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온라인으로 이 방송에서 흐르는 음악을 듣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Balthazar이라는 레스토랑에서
디저트 하니 시켜서 둘이 나누어 먹었다.
Singing in the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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