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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참된 피난처

참된 피난처

새가 자유라고 누가 정했을까요. 비록 마음 가는 대로 날아갈 수 있다 해도

도착할 장소도, 날개를 쉴 수 있는 가지도 없다면

날개를 가진 것조차 후회할 지도 모릅니다.

참된 자유란, 참된 자유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최유기 중)."

 

 이태 전 11월 어느날, 뉴욕 시내를 벗어나 뉴욕주 북쪽으로 그를 만나러 가던 길은 온통 얼음 꽃이 하얗고 눈이 부시게 피어 있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빼어난 경치에 푹 빠져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를 잊을 정도로 넋을 잃고 말도 잃었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시골길을 한 십여 분 가니 길 오른 쪽으로 야트막한 야산이 눈에 들어왔다.  코너를 돌자 바로 교도소 팻말이 나타났다. 황홀경에 빠져 있었던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교도소 팻말을 보고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팻말을 끼고 오른 쪽으로 회전을 하니 언덕길이 나타났다. 언덕 위에는 교도소 건물은 보이지 않고 십여 미터는 됨직한 담장이 성곽처럼 둘러 싸여져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언덕길을 오르는 우리에게 우뚝 솟은 담장과 함께 군데군데 솟아 있는 망루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담장 위에는 갈매기처럼 보이는 새들이 앉아서 우리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교도소 이름이 참으로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피난처’, 혹은 쉼터라는 뜻을 가진 그 곳은 눈꽃으로 뒤덮인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영 쌩뚱맞고 살풍경하기까지 했다. 천국이라는 단어와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닌 그 곳은 팻말이나 이름이 없어도 천국처럼  아름다운 주변의 풍경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강짜를 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으니 말이다.

 

천국같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한 피난처에서 나는 그날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내가 그를 만나기 두어 달 전인가 본당의 빈첸시회오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교도소 방문에 우연하게 함께 했던 아내가 권해서 이루진 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내 마음은 그를 만나는 것보다는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피난처라 불리우는 감옥 구경을 하는 것과 함께 그 곳에 가는 길 주변의 풍광이 아주 빼어나다는 사실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수인을 면회하기 위한 수속과 ()수색을 마친후 면회실로 향했다. 네 개의 철문을 지났다. 가는 길 앞 뒤로 철문이 있었는데 철문은 동시에 열리는 법이 없었다. 하나의 철문이 닫히고서야 또 하나의 철문이 열렸다. 간수가 문을 열여주어야 다음 문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닫는 수고로움 또한 자유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셧 개의 철문을 지나 면회실까지 온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를 만나던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미소가 눈꽃처럼 희고 아름다왔다. 자기 입으로는 한 마디도 꺼내진 않았으나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듣고 보니 그는 누명을 쓰고 갇혀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33년이라는 무거운 형을 받고서 말이다. 조용한 아침 시간에 일어나 성경도 읽고 대학 공부도 하는 그는 교도소 내의 아시안 클럽의 회장으로서, 그리고 마약과 알코올 중독증이 있는 수인들을 돕는 프로그램에도 자신의 개인 시간을 쪼개어 참여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범수로서 좀 더 자유롭고 편한 환경이 제공되는 다른 교도소로 옮길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으나 영어를 못하는 다른 한국인 수감자들을 위해 스스로 가장 악명이 높은 그 피난처라는 이름의 교도소에 남았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던 사람들도 다 용서하고 이제 만날 수 있다면 편한한 마음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표정에서 오랜 세월 수도한 구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구상 시인의 시 꽃자리에서처럼 가시방석을 꽃자리로 만들어 가며 살고 있었다.

 

교도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열 일곱 살, 그리고 지금까지 형량의 반을 조금 더 넘겨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만큼의 긴 시간이 지나고 형기를 마치면 그의 나이가 쉰을 넘게 된다고 하는 그에게 불현듯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날 형과 아우의 연을 맺었다. 삼촌이나 아저씨라는 호칭보다는 얼음꽃처럼 싱싱한 삼십대 청년의 형이 된다는 것은 나도 덩달아 젊어지는  아주 수지 맞는 거래였다. 우연히 그리고 쉽지 않게 얻은 내 젊음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나는 매 달 피난처로 아우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지난 해 9월엔 그 피난처를 들락거리며 영세를 받는 그의 대부가 되었다.

 

누군가의 형이 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피난처가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은 아닐까. 그 누군가가 찾아와 편안하게 쉬고 다시 힘을 얻어 다음날 아침 힘차게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의 둥지같은 존재가 형이나 아버지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가 지금 있는 피난처를 나올 때 쯤이면 그의 부모님의 연세가 여든을 훌쩍 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가 살고 있는 피난처꽃자리가 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나는 기꺼이 그의 새롭고 진정한 피난처가 되어야 하리라. 내 비록 내 형제와 수많은 대자들에게 영 부실하고 무정한 형이며, 대부이긴 하지만 그에게만은 참된 형과 대부가 되고 싶다. 다른 모든 이들이 가진 자유를 그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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