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일기
한국에서 돌아오기 전 날,
서울의 북촌이라는 곳을 다녀왔다.
고등학교 친구인 택규군이 마음을 써 준 덕이었다.
분당에 무슨 일이 있어서
오는 길이라고는 했지만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애써 핑곗거리를 만든 것이 분명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느는 게 눈치라고 했던가.
때론 그런 마음을 기쁘고 반갑게
받는 것이 마음 써 주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북촌으로의 하루 탐방 제안을
넙죽 받아들였다.
북촌은 종로 북쪽에 있는 동네를 일컫는 지명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관직에 오른 노론들이 많이 살았던
고급동네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택규군이 태어나고 자랐던
삼청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감사원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 천천히 걸을을 옮기기 시작했다.
택규군에게는 고향을 찾는 셈이고
나는 내가 어릴 적 살던
제기동으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을
한 셈이 되었다.
누가 사는 집일까?
나무의 무늬.
대문에 박힌 쇠로 된 장식이
지워진 내 기억 속에서
새 살이 돋듯 그렇게 살아났다.
집 안에 들어가면
대문엔 내 팔뚝만한 빗장이 있었던 것 같다.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
그런데 문 앞에 풀이 자라고 있다.
집이 비었나 보다.
사람은 살지 않고 풀 몇 포기가 집을 지키고 있다.
저 풀들로 해서
고요함이 더 부각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릴 땐
집집마다 저런 문패가 붙어 있었다.
나무로 된 것도 있엇고
저렇게 돌 로 된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돌로 된 문패를 가진 사람이
더 부자라고 생각했었다.
집을 사서 이사를 하고 대문 옆에
문패를 걸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을 소유한 뿌듯함이
저 문패에 담겨 있을 것 같다.
평생 자기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가져 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이------
문
옛 것과
새 것이 같이 존재하는 곳.
창 문에 비친 저 선들.
저 선을 통해서
새로운 시간과 문명이 흘러들어온다.
내가 50년 전 살던 제기동의 풍경과 비슷한 것 같다.
다른 건 골목에 차가 있다는 것.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전기도 써야 하고
개스도 써야 겠지.
그리고 TV 안테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참으로 많은 것들이
때론 형태를 갖추어서
때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로
집으로 흘러들어 온다.
행복이나 사랑 같은 것이
흘러 들어오는 선이나 관 같은 것은 없는 걸까.
우리가 살던 집도 아주 좁은 골목길에
있었던 것 같다.
골목길.
흔히들 문간방이라고
골목길과 바로 맞닿은 방에서는
사람 사는 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밥 먹는 소리며
심지어는 싸우는 소리까지도.
그 소리들,
아직도 들릴까?
등을 돌리니 남산이 보였다.
이 곳이 북촌이 맞긴 맞나 보다.
제법 키가 큰 기와집이다.
담에도 기와가 얹혀 있다.
삶이 발견되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
생명이 없는 빈 집들 같은데
저 야구르트 가방을 보고는
삶의 흐릿한 흔적이 느껴졌다.
갑자기 저 집의 문을 두드리고 싶어 졌다.
저 가방에서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잊혀진 기억 속의 그 누군가가
문을 열어 맞아줄 것 같았다.
일본 관광객들.
안내원이 설명을 하고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아마도 저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인 나 보다도
더 많이 북촌에 대해 알고 돌아갈 것이다.
나는 왜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 건지 모르겠다.
굳게 잠긴 문.
옛 날에 어떤 자물통을 썼을까?
가지고 있는 자들은
늘 성능이 뛰어난 자물통을 필요로 한다.
저 자물통은 참 소박하기도 하다.
무엇을 지키기 위함보다는
집에 사람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는 뜻 정도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또 새로운 모습의 자물통이 보인다.
큰 복이나
많은 경사도
문이 열려 있어야 그 집으로 들어가는 법.
저리 문이 꼬옥 잠겨 있어서야 어디
헤집고 들어갈 수가 있느냐 말이다.
골목길.
어릴 적 밤이 이슥해 지면
저 골목길에
"찹쌀 떠억,
메밀 무욱 "
하는 진양조의 느린 장단으로
깨어 있던 사람들의
시장기를 유혹하던 소리가 들렸었지.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두부 사아려"하고 외치던
두부 장사의 중저음 톤의 목소리로
새벽이 열렸었지.
그 사람들,
그 시간들.
계단 오르는길에
마주친 풍경.
일행이 한꺼번에 무언가를 마시다가
동시에 마시기를 마치고
일제히 내려 놓았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빈 컵을 내려 놓고
시간을 두고
사람들이 하나씩 내려 놓았을까?
나중에 다시 가서 확인하고 싶은 곳.
택규군 설명에 의하면
이 곳이 빨래터라고 했던가
우물터라고 했던가.
가을이 찬찬히 내려 앉고 있었고
태어나서 수십 차례의 가을이 지나간
그 시간을 택규군이
바라보고 있다.
혹시 여기에도 무슨 기억의 CC TV 같은 장치가 있다면
이 곳을 거쳐간 동네 여인들의
기쁨과 슬픔 같은 것들이
서리서리 풀려 나오지 않을까 싶다.
구름 같은 시간들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낙엽 같은 시간들이라고 해야 할까.
흩어지고 떨어지는
시간,
아, 시간들--------
우리는 택규군이 태어나서
삼십 년인가 사십 년을 살았던
생가에서 두 집 떨어진
작은 집에 들어갔다.
커피 1000원
커피 원두를 갈아서 내려주는데
한 잔에 천원.
착한가격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건 착한 게 아니라
아주 바보 천치 가격이다.
우리는 거기서
커피 두잔 씩을 마셨다.
나무루된 처마에 잇대어 함석으로 된 물받이가
하늘의 면적을 제한했다.
옛날 우리집도 그랬던 것 같다.
좁은 하늘.
그렇게 좁은 골목길 바로 옆 집에서
좁은 하늘을 보고 살았다.
택규군은 이 집에 사시던 할아버지를 회상했다.
강씨 할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이 집엔 얼씬도 하지 못했었노라고---
택규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계시지 않는 강씨 할아버지 집에
머리 숱이 반이나 빠진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대문 안에 발을 들인 소감이 궁금했다.
지금도 강씨 할아버지가 그 곳에 계셨다면
무서워서 얼씬도 하지 못했을까?
아, 시간,
시간이라는 존재.
4차원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찻집은
시간이 이른 탓인지
흘러가는 구름처럼 한가했다.
덕분에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구름처럼 여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커피 한 잔에 천원 하는 가격으로
어찌 운영이 되는 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마당 한 쪽에 가방이 전시되어 있었고
방과 방 사이의 마루에도 가방이며
악세사리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당에서 밖을 내다 보니
보이는 건 앞 집의 벽.
햇살이 좁은 지붕들을 간신히 지나
여기까지 이르렀다.
우리 집에도 초서로 쓰인
글귀가 저렇게 걸려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글 모양은 낯이 익어도
내용은 늘 낯이 설다.
골목길엔 항아리도 있었고
불을 때던 아궁이도 눈에 띄었다.
삼청로인가 하는 길에서
이 동네 오래 사신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아마 머리 숱이 많이 빠졌다는 말씀을
그 할머니는 하셨던 것 같다.
매일 보던 얼굴이면 작은 변화를
함께 경험하기에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현재에 익숙해지지만
시간의 틈이 있으면 그 변화는
눈에 뚜렷하게 감지되는 것이다.
시간이 부리는 마술,
그것이 사람들에겐 늙어간다는 말과 같다.
목욕탕.
굴뚝. 그리고 김이 올라오는 로고.
아직도 이런 목욕탕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신길동에 살 때는
친구네 집이 운영하는
신길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했다.
그런데 여기 삼청동에 있는 목욕탕 이름이
'코리아'다, 코리아.
예전부터 이름이 코리아였을까,
아니면 삼청 목욕탕이었는데
세계화 추세에 발을 맞춘 것일까.
택규가 점심을 대접한다고 했다.
삼천동 토박이인 택규에게
특색 있는 곳을 추천하라고 했더니
바로 이 곳 '삼청동 수제비'와
우리가 점심을 먹은 '매셍이 칼국수'집
두 곳을 대었다.
'삼청동 수제비'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는
저렇게 긴 줄을 서야 하는데
그 길이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매셍이 칼국수로
마음에 점을 찍었다.
매셍이는 미역과 파래 그 중간 쯤 되는
해초류로 짐작이 갔다.
'매생이는 동의보감에 의하면 피를 맑게 하고----'하는
광고성 문구가 하나 식당에 붙어 있을 법 한데
보진 못했다.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식사 후에 식당 밖으로 나오는데
건장한 남자 두 서넛이 식당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서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는 폼이
누군가의 경호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우리와 같은 시간에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바로 한 블락 떨어진 총리 공관으로
걸어가는 뒷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상 참 좋아졌다.
시간을 200년 뒤로 돌린다면
나나 친구나 땅에 머리 를 조아려야 되는 것 아닌가
'영의정 나리 행차시다'
어쩌구 하면서 그런걸 강요했던 시대에 살지 않는 것도
참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궁금한 건
경호원들이 귀에 꼽고 다니는 이어폰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릴까 하는 것이다.
너무 단조로운 무전 소리 대신
몰래 자기가 좋아 하는
음악 소리가 나는 이어폰을 듣는 경호원도 있으려나 하는
아무 영양가 없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계단을 올라서
내려다 보니 기와지붕이
눈 밑에 들어왔다.
풀과 꽃이 그 위에서 피어났고
무슨 줄인지 까만 케이블이
기와 위를 기어가고있다.
자연과 인위가 공존하고 있다.
길은 좁다.
불이 나면 불자동차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
집집마다
'너도 나도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같은
표어를 붙여 놓아야 할 것 같다.
장독대.
싸리꽃(?)
그리고 이불
삶이 만져지지 않는가
장독 뚜껑을 열면
고추며 숯 같은 것들이
까만 간 장위에 둥둥 떠 있었다.
저 장독의 뚜껑을 열면
그런 기억들이 장 위에
둥둥 떠 있을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택규가 놀던 삼청 공원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물터의 바가지
저런 원색의 플라스틱 불건을 보면
어린 시절 시장터에서 하던
빙고 게임이 떠오르곤 한다.
국에 3 국에 3
산에 5 산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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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마이크 잡은 사람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말 하나마다 숫자를 부르고 나면
여기 저기서
'당첨이요!' 하는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고
주최하는 장사꾼들은
저런 플라스틱 그릇 같은 것을 상품으로
인심 쓰듯 주곤 했다.
그걸 탄 사람은 집에 가서
무슨 무용담이라도 들려주듯
한 껏 들뜬 기분으로 자랑을 늘어 놓았을 것이다.
작은 것이 주는 행복- 그땐 그랬다.
택규가 다이빙을 했었다는데
믿어도 되는지------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가.
그 땐 그랫을 것이다.
공원 안엔
이렇게 자갈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돌들을 깔아 놓은 곳이 있었다.
신을 벗고 걸었다.
발 맛사지를 하는 곳이었는데
나도 친구도 해 보았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횡보 염상섭 선생의 동상이 있었다.
옆에서 한 장.
택규의 첫 사랑이 서린
삼청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
'삼청 공원'이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랑은 그런 상대의 느낌을 아는 것,
그리고 알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택규의 첫 사랑 이야기를 듣고
삼청공원이 다른 톤으로 들렸다.
그리고 나와 택규의 사이도
더 가까와진 것 같았다.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이 쌩떽쥐베리가
'어린왕자'에서 여우의 입을 빌어 말했던
길들여 지는(tame) 일이 아닐까?
삼청 공원 입구에 있어
다시 커피 한 잔을 더 마셨다.
그 곳에 전시되어 있던
12간지에 해당하는 동물들의 그림과 속성을
풀어 놓은 작품이 있어 모셔 왔다.
내 것만 하려고 했는데
닭 띠가 '의리가 있는' 동물이라는 말이 걸려서
아내의 것도 모셔 왔다.
아내는 오팔 년 개띠.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개 띠가 다 그런 건가?
탁자 위에도 알 듯 모를 듯한 글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일단은 북촌 일기는 끝을 내야 겠다.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친구 따라 강남이 아닌 강북에 다녀 왔다.
가장 귀한 선물은
자신과 자신이 가진 시간을 내어주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택규와 보낸 일요일 오전 한 때는
북촌을 구경한 것을 통해
친구라는 아주 귀한 선물을 받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북촌과 삼청 공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제부터는아무런 의미 없이
내 귀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단어가 아니라
소중한 기억과 우정이 되살아나면서
내 마음을 두드릴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유년기를 보냈던
동대문구의 제기동으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여행을 했다.
지금 내가 떠 올렸던 나의 집터는
도시개발이라는 면목으로 다 헐려서
휑한 길이 되어 있다.
고향은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 속에 존재한다.
기억과 시간 속에 저장된 고향은
그 누구, 혹은 그 무엇도
지울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막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북촌을 반대로 거슬러
떠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