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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스님이 자기 머리 못 깎는다지만------

 

스님이 자기 머리 못 깎는다지만------

 

 

'스님은 자기 머리 못 깎는다.'

나도 내 머리 못 깎는다.

그러므로 나도 스님이다?

 

내가 스스로 내 머리를 못 깎기에

전속 이발사를 두었다.

다름 아닌 우리 마님이시다.

 

미국 와서 처음엔 차도 없는 데다가

이발소가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그러므로 손재주 많은 아내에게 이발을 부탁했고

아내는 자연스레 내 전속 이발사가 된 것이다.

내 년이면 이민 온 지 30년이니

거의 30년 동안 줄기차게 내 머리를 깎았다.

보드라운 아내의 손에 내 머리를 맡기면

그렇게 행복할 수 가 없는데

거기엔 무슨 마법 같은 것이 있는지

중독성도 있는 것 같다.

 

단지 아내에게 머리를 깎이기 시작한 때부터

구약 성경의 '삼손과 데릴라'이야기에서 처럼

아내에게 영 맥을 못 추게 되었다.

내 머리에도 무슨 힘의 비밀이라는 것이 있어서

머리를 깎이면서부터는

아내는 이발사가 아니라

마님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 주변머리(귀 주변)가 없어서

아무 이발사에게나 머리를 맡겼다간

쥐에게 물어 뜯긴 것처럼 아주 흉칙한 모습이 되기 십상이어서

내 외모 관리 상 어쩔 수 없이

내 머리의 비밀(?)을 아는 마님께

오늘도 머리를 통째로 맡길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으로 해서

나는 마님 앞에만 서면

자꾸 작아지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오늘도 마님께 머리를 맡겼는데

처음에 깎고 나서 마음에 안 드는지

두 차례나 머리를 더 깎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10분 단위로

샤워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게으른 탓에 두어 달에 한 번씩 깎는 머리를

하루에 세 번이나 깎은 것이다.

아니 깎인 것이다.

아내는 큰 아들 머리 깎은 것을

침이 마르게 창찬을 하더니

작정을 하고 거사(?)를 시작했다.

옆머리를 치켜 깎기 시작했다.

긴 머리에 감춰졌던 머릿속 치부가 보였다.

 

옆머리를 짧게 치고

앞머리도 짧게 깎은 후

흰 이마가 드러나자

아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 남편 이마가 훤한 게

인물 살아났다'고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보기엔 털 뜯긴 닭같은데------

 

그래도 '꼬끼오' 소리 한 번 못 냈다.

내가 내 머리 못 깎는 약점이라면 약점을

아내가 대신 해주는데

고마움을 표현하지는 못할 망정

누구 안전에서 불평을 하랴?

 

아내는 아들이 쓰는 뭐라든가

무스(?)라는 걸 머리에 바르더니

이리 저리 머리를 세우고

요리조리 움직이며

죽이거니 살리거니 모양을 내더니

드디어 거사(?)를 완성했다.

 

내 머리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내 팔자.

 

 스님이 자기 머리는 못 깎아도

시진사가

자기 모습은 찍을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내에 대항해서

'꼬끼오' 소리는 못 내고

거울의 힘을 빌어 기념 삼아

나도 내 모습을 한 장 찎었다.

 

머리 깎는 데에는

전혀 주체적이지 못하지만

내 모습을

내가 주체적으로 찍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나도 살아 있는 존재임을

간접적으로나마 아내에게

스스로 찍은 내 사진으로

소리 없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쥐가 뜯어먹은듯한 내 머리는

머지 않아 자라서 치부를 덮을 것이고

또 머리를 깎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나의 머리카락은

 다시 아내의 부드러운 손길을 갈망할 것이고

그 때를 위해서

나는 오늘도 마님의 순한 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머리 깎은 내 모습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