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 쓸데없는 이야기 2

천천히 걸음을 걷는다는 것은
주변에 찬찬한 눈길을 줄 수 있는 시간을 얻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바쁘게 살아야 할 때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던
길거리 광고를 읽는 일에 시간을 쓰기도 한다.
사진은 제주 민속촌 안내소의 유리창에 붙어 있던 공익광고다.
시간에 쫓기며 살 때에는 쳐다보지 않았을 종류의 광고다.
노인 특별히 혼자 사는 노인들을 위한
관심과 배려를 이끌어 내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이 든 사람을 이르는 노인(老人)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
노인의 연령을 규정하는 잣대는 없지만 오늘날 대개 나이가 65세 이상 먹은 사람을 이른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당당히 노인의 자격이 있음에도
노인의 범주에 누가 나를 분류한다면
기분이 그리 상쾌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몇 해 전에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을 여행할 때
관광버스에 동승했던 가이드가
나를 '아버님'이라고 호칭을 해서 잠시 어색해했던 기억이 있다.
미국에 살고 있던 내가
'아버님'이란 호칭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고
내 자신이 아직 노인의 범주에 기꺼이 발을 집어넣을 만큼
그렇게 나이가 먹지 않았다는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이
내 속에 자리하고 있음이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손주들에게 할아버지라는 의미의
'하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면 감당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고,
'65세 이상 할인'이라는 문구를 보면 눈이 크게 떠지면서도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아버님', 혹은 '어르신'이라고 불리면
어색하고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는
나의 이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광고 문구에서는
노인의 노를 영어의 'know'로 바꾸어 썼다.
여기서 'know'는 지식으로 노인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라는 의미, 즉 'understand'의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해한다는 의미의 영어 'understand'는
말 그대로 누군가의 밑에 선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군림하면 절대로 안 된다.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누군가의 밑에 자리해야
비로소 이해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이해함은
노인에 한정되지 않고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그 영역이 넓어져야 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형식적으로 나도 이젠 노인의 범주에 들어섰다.
그러나 아직은 누군가의 이해와 배려의 대상이기보다는
이해하고 배려를 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하늘이 내게 준 축복 같은 것이다.
65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으므로
제법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아직은 무늬뿐인 노인인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광고지 하나 보고 쓸데없는 이야기 또 하나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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