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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제주일기 - 북 카페 달리

제주 일기 - 북 카페  달리

어제는 아침에 호텔 근처 산책을 했다.

제주에 도착해서 처음 이틀 동안은

반바지를 입고 다녀도 그저 기분 좋게 선선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 호텔 밖으로 발을 내미는 순간

선선하다는 느낌이 쌀쌀하다로 바뀌었다.

날씨가 시옷(ㅅ)이 쌍시옷(ㅆ)으로 경음화되었다.

선선이 쌀쌀로 바뀌었다.

 

나는 이런 날씨를 좋아한다.

 

입에서 커피를 향해 구애의 신호가 

강력하게 퍼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 호텔 근처에는 없었다.

큰길을 무작정 걷다가 문이 열려 있는 카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가게 오픈하는 시간이 10 시였다.

그런데 take out 손님을 위해 창쪽이 열려 있었다.

 

카페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분주히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커피 마실 수 있나요?

 

판매 창구를 통해 

쌀쌀한 바깥공기와 함께

카페 안으로 흘러들어 간 내 목소리에서 애절함이 묻어 나왔을 것이다.

 

"한 10 분 정도 기다리셔야 되는데----"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10 분을 기다리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카페 안은 산뜻하고 깔끔했다.

 

그렇다. 나는 널널한 시간을 가진 '시간 부자'인 것이다.

나는 아내와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급히  중독자처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커피 안에 시간도 갈아 넣어

천천히 함께 마셨다.

 

"어느 나라 산 커피예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질문을 했다.

 

"과테말라 산이라고 하더라고요."

카페 주인으로는 아주 새내기인 티가 나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 새내기 티가 어제 아침 공기처럼 신선했다.

시간과 함께 하는 커피는 맛이 좋았다.

시간에 쫓기며 마시는 커피는 입 안만 즐겁게 해 주었으나

시간과 더불어 마시는 커피는 마음속까지 따스하게 덥혀주었다.

더구나 과테말라 커피는 선물을 받아 한동안 마신 적이 있어서

내 입과 잘 맞았다.

 

호텔로 돌아와 아내와 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제주도의 한림이라는 곳에 있는 '달리'라는 책방이 목적지였다.

예전엔 이런 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고

효율성 앞에서 여유는 사치이기 때문이다.

 

호텔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202번 버스를 탔다.

아내의 설명에 따르면 60 군데가 넘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야 한다고 했다.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도 넘게 걸린다고도 했다.

예전에는 60이라는 숫자,

한 시간이라는 시간 단위에 이미 질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시간 여행자'라는

제법 철학적인 냄새가 풍기는 신분이 아닌가.

백수라는 말이 주는 값싼 이미지와는 달리

'시간 여행자'라는 말은 레벨이 다르게 있어 보인다.

 

현재의 시간과, 또 내 앞에 놓인 시간과 발맞추어 걸으며

순간 순간을 선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을 만지고 바라보며 쓰다듬기를 즐겨할 것이다.

 

202번 버스는 해안가와 또 마을 사이를 달렸다.

중간에 우리가 4 년 전에 왔었던 애월의 바닷가도 지났다.

60 개가 넘는 정류장마다 서서 승객을 태우고 내려주며

버스는 우리를 한림 고등학교 앞에 데려다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키 작은 건물을 돌아 서니

우리의 목적지가 보였다.

 

책방 '달리'는

헌 책과 새책을 구비하고 있으며

책 사이를 음악이 여유롭게 흘러 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고,

주스나 커피를 마시며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내는 티 한 잔을,

그리고 나는 감귤 주스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시간을 껴안는 연습을 했다.

 

-조급해하지 말자-

 

책방 이름이 '달리'인 까닭이 궁금했다.

나는 처음에 스페인의 그 유명한 '살바토레 달리'와의

연관성을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 책방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던 방식과는 달리  살겠다는

일종의 언약식을 하는 장소라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시간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꾸고 정화하는 세례식을 

나는 책방 '달리'에서 했던 것이다.

 

책방을 나오니

들어갈 때보다 더 강한 바람이 뺨에 와닿았다.

 

우리는 버스를 타기 위해

차도가 아닌 마을 사잇길을 걸었다.

빈 터에는 양배추며, 대파, 무 같은 채소들이

푸른빛으로 생생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11월에 제주에서 맞는 푸르름,

 

앞으로 내가 맞은 시간들도

그 채소들처럼 푸를 수만 있다면----https://hakseonkim1561.tistory.com/2784#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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