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 지 2번째 주일을 맞았다.
느린 걸음으로 늦가을 분위기가 흠씬 나는 길을 걸어
성당까지 도착하는 데는 15 분 정도 걸렸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좌 신부님(Fr. James)이
성당 뒤에서 복사들과 입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Good Morning, Father!"
낮은 톤으로 내가 인사를 건넸다.
신부님은 "안녀하세요!" 라며
어색한, 그러나 한국어가 분명한 말투로 인사를 했다.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를 하는 투가
한국 음식과 BTS나 영화 미나리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직 말을 섞은 적이 없지만
성당에 온 사람 중 유일한 동양인 나에게 친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미사 중 신자들의 기도 말미에
특별히 대한민국 서울의 이태원에서 발생한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과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도
James 신부님은 첨가했다.
사제와 신자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적으로 친밀함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특별히 오늘 복음 말씀은
세관장이며 부자인 자태오가
예수를 보려고 나무 위에 오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예수를 만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하며 살아왔을까?
키가 작아서 안 보인다는 핑계로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던은 아닌지.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외칠 때
내 앞의 너무 많은 것들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삶도 신앙도
진화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전진해야 하는 것일 텐데.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서 안주하며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미사 드리는 동안 볼 수 있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며
잠시 성모상 앞에 섰다.
이 성당의 성모상은 앞으로 약간 기울었다.
처음엔 성모상을 만들고 세운 사람들이 실수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차례 성모상을 지나치며
생각이 바뀌었다.
성모상이 앞으로 기울어진 것은
자녀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지 않고,
나에게 오는 ,
아니면 나에게서 멀어지려는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이 기울어진 성모상에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아이들에 대한,
그리고 아내에 대한,
혹은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과연 어떨까?
적극적으로 다가서기 위해 몸과 마음이
앞으로 기울어져 있을까,
아니면 꼿꼿이 허리를 펴고
제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을까?
이제 내 앞에 놓여진 숱 많은 시간들.
시간이 없다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를 주저했던 과거는
등 뒤에 두고
이젠 발 걸음이라도 떼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사간에 얽매이지 않고
반 걸음이라도 세상을 향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신분,
바로 백수가 얻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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