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 한 편지 1
"때르르릉----, 때르르릉------"
비몽사몽 간에 들려오는 소리.
"저게 무슨 소리지?"
구식 자명종 소리 같기도 하고, 내 휴대 전화기 소리 같기도 한
소리의 출처를 잠 속에서는 정리 못한 채,
눈을 뜨고 거실로 나왔다.
'아,맞다, 주말에 집에 갔다가 아내는 집에 남고
바로 전 날, 일요일 저녁에 나만 부르클린의 아파트로 왔었지.'
비로소 내 위치와 상황이 대충 짐작이 되었다.
탁자 위에 둔 내 휴대 전화기에서 가느다란 불빛이 반짝이며 벨이 울리고 있었다.
월요일 오전 5시 20문 쯤.
전화기를 들고 발신자의 번호를 보니 영 낯이 설었다.
달콤한 내 잠 속으로 스며든 침입자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지난 3월 초 한국으로 돌아가신 이후
잠 잘 적에 전화가 걸려오면 늘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곤 했었다.
혹시나 하고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나갔다.
전화를 무작정 끊은 일에 대해 후회를 할 새도 없이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동생 전화였다.
직감적으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 형, 아버지가 위독 하시대."
늘 차분하던 동생의 목소리가 그날은 푹 젖은 채
내 귓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순간 모든 것이 깜깜해졌다.
무얼 어떻게 해야할 지 내 사고 체계가 멎고 말았다.
동생이 급히 비행기 표를 구하기로 했고
자주 해외 출장을 다니는 동생이 그런 일은 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나는 한국에 갈 준비만 하면 되었다.
지난 번 LA 여동생 집으로 부모님을 뵈러 같이 갈 때도
동생과 같이 갔었는데 여행 다니는 일 하나만은
흔히 하는 말로 '도사'인데다가
꼼꼼하고 치밀하게 일 처리 하는 걸 보면
영 아버지를 꼭 빼서 닮았다.
나는 부재중 가게일을 정리해서 맡기면 다른 건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동생과의 통화가 끝나자 다시 전화벨이 다급히 울렸다.
아까 신경질적으로 끊었던 그 낯선 번호였다.
이번에는 당연히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노안이 오고 난 후부터는 전화를 받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잘못 엉뚱한 곳을 누르는 일도 가끔 일어나기 때문이다.
외사촌 동생 광수였다.
이메일로는 가끔 연락을 하지만 전화를 주고 받는 일은 없기에
번호가 영 낯이 설었다.
우리 형제 모두가 미국에 있어서 하지 못하는 자식노릇을
대신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기 모교의 교수로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우리 부모님까지 챙기는 광수의 전화는
아버지의 생명의 불꽃이 희미해져감을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시켜주었다.
광수에게 진 너무나 많은 빚.
삼년 전인가 한국에 갔을 때 광수가 추억 하나를 꺼낸 적이 있었다.
자기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내가 대학 다니며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영한사전을 사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작 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까마득히 있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하찮은 일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움도 삼십년 세월이 지나면,
빛도 바래고 삭아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는 늘 새로이 포장해서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외삼촌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이후,
참 고생스럽게 살아온 외숙모와 광수 삼형제.
지금은 모두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고
형제들 간의 우애도 깊다는 말을 부모님들에게서 들을 때마다
마음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광수와의 톨화를 마치고
주말 동안 집에 들어가 NJ에 있는 아내에게 전활 걸었다.
내 전화를 받으면서 아내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내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내 목소리만 메말라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맞아야 하는 임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나를 세상에 있게한 존재가
이 지상에서 소멸한다는 소멸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을까?
그 때의 복잡했던 감정의 가닥을 이주일이 지난 지금도 풀지 못하겠다.
아니 평생 동안 풀 수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가게로 와서 내가 갑자기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을 맞아
준비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
직원들에게 전화를 해서
좀 일찍 출근하라고 일렀다.
세 명은 20년 넘게 나와 같이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인복이 있는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지지리 못나고 융통성이 없는 까닭인지
긴 세월을 함께 지냈다.
따지고 보면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힘들고 고단한
이민의 삶을 헤쳐올 수 있었을까.
사실은 그들도 다 이민자들이다.
멕시코, 트리니다드, 에콰도르.그리고 한국, 미국
이런 각기 다른 출신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물론 삐그덕거림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이만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미국이란 나라의 힘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내 여권과 검정색 양복이며 넥타이 같은 걸 준비해서
아내가 부르클린으로 나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막 바빠지기 시작하는 가게를 생각하면
떠난다는 일이 저으기 걱정이 되었다.
이럴 때마다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하는 가정으로 내 뒤에 남겨진 것들과 작별하곤 한다.
못 떠날 일이 없는 것이다.
참 많이 연습을 해서 제법 떠나는 일에 능숙해졌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내가 연습한대로 그렇게 떠날 수 있을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남은 일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직원들에게 일을 분담시키고 등 뒤의 일은 잊기로 했다.
한국의 친구 몇과 지인들에게 간단히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동생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부치지 못 한 편지 2
비행장에 도착해서 아내와 작별을 했다.
동생과 나는 오후 두 시 비행기.
아내는 아마도 밤 12시 30분 비행기로 우릴 뒤따를 것이다.
내가 인천에 도착하기 전,
아마도 얼마간 아내와 난 하늘 위에 함께 떠 있을 것이다.
긴 거리를 사이에 두고서 말이다.
거리, 공간.
살아가면서 때때로 느끼는 그 거리, 그 공간.
아버지와 나 사이에도 그런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같은 하늘이라도 멀리 떨어진 그런 공간과 거리가.
라운지에서 커피와 함께 간단한 요기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가 타고갈 비행기는 내 기억이 맞다면 A380이었다.
동생의 설명으로는 비행기가 이층으로 되어 있어서.
승객을 Boing 747의 거의 두 배 가량 태울 수 있다고 하는데
나같이 비행기 뜨고 내리는 것도 신기해하는 사람에겐
호기심에 눈을 크게 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닌게 아니라 같은 비행기를 타는데도 입구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래층 입구와 윗층의 입구가 달랐다.
'아버지와 아들인 나의 생각도 늘 이처럼 갈렸던 건 아닐까?'
내가 있는 공간의 비행기 모습만이 다인 것처럼 살아가는 나.
좁은 각도, 짧은 촛점 거리 - 내 시선이다.
내가 앉아 있던 아래 층엔 또 하나의 세상이 있는 것을--------
아버지가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고통 받고 계시다는데도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니
아버지는 까맣게 잊고
볼거리가 은밀히 던지는 추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다.
하기야 불구경, 싸움구경 하느라
학교 다니면서 강의를 빼먹은 적이 어디 한 두번이라야 말이지.
곁에 있던 다른 비행기들보다 키도, 몸체도
우리가 타고 갈 A 380이 훨씬 더 큰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A 380보다도 훨씬 더 크신 존재였다.
아버지 살아 생전엔 나이가 들어도 철은 들지 않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같은 자식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비행기에 앉아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생이라고 해야 나이가 아홈살 차이가 나니
자라면서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별로 없다.
게다가 차가운 성격인 내가 동생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었을 리가 없다.
보이는 것만 보고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춰
어린 동생을 바라보지 못했던 나.
아, 나라는 사람.
동생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이젠 형하고 같이 여행할 일도 별로 없겠어."
올 2월 말에 LA에 있는 여동생집에
부모님을 뵈러 동생하고 같이 다녀온 적이 있다.
동생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때 참 좋았었는데-----"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동생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우린 2월 말 밤 늦게 LA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을 놓고 한 잔할 곳을 찾아
변두리의 밤거리를 헤맸었다.
결국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고
호텔방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로 허기를 달래고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로 한 잔 했다.
그 하찮은 일도 동생에겐 소중했었나 보다.
아무런 것도 아닌 것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관계.- 아, 그것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밋밋하기만 했던 동생이 갑자기 소중한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생과 둘만의 여행도 부모님이 계셔서 가능했었다.
아버지 임종을 맞으러 가는 이 여행이 끝나면,
언제나 또 다시 둘만의 여행이 가능할까?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
이젠 '마지막'이란 말이 슬퍼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때까지는 비교적 담담했었는데,
동생이 그 말을 꺼내자 비로소
팍팍하게 마른 가슴 속에 싸한 슬픔 같은 것이 밀려 들어왔다.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어둔 밤바다의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가을의 밤꽃 냄새 같이 싸하던 그 기분.
비로소 아버지라는 존재가 이 지상에서
소멸해가고 있음이 늦가을의 바람처럼 내 피부에 와닿았다.
아버지는 우산 같은 존재다.
죽음이라는 비로부터 나를 가려주는 그런 존재.
때론 빗물이 튀어 조금 젖은적도 있었겠지만
우산 덕에 흠뻑 젖은 적은 없었다.
가족 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지만
그건 내가 어리고, 젊었던 날의 이야기다.
슬펐지만 죽음을 느끼진 못했다.
이제부턴 내가 우산이 되어
쏟아지는 비를 맨 몸으로 맞아야 한다.
텅 빈 우주에서 홀로 유영하는
우주인의 외로움이 이러할까?
갑자기 비에 젖은 것 같이
으스스해짐을 느꼈다.
비행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날고 있었다.
부치지 못 한 편지 3
인천 공항에 도착한 것이 한국 시간으로 10월 2일,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였다.
이미 어둑어둑 어둠이 깔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여즉 하늘이 밝았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마음이 조급했던 탓이리라.
아버지를 찾아갈 때면 늘 비행기에서 파는 양주를 사곤 했다.
양주는 한 마디로 '가오'가 서는 선물이 되었다.
비행기에서 사는 양주는
면세이기 때문에 가격이 시중에서 사는 것보다 싸서 부담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술을 담은 박스에서부터 검은 색과 금빛이 어울려 풍기는 분위기가
선물을 받는 사람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은 위엄같은 것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께는 무얼 살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양주는 최고의 선물이 된곤 했다.
"뭘 이런 걸 다 사오냐"고 하셨지만
속으로는 무척 좋아하신다는 걸
그 누가 보아도 아버지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양주 한 병으로 마치 효도를 다 한 것 같이
아버지의 표정을 읽으며 스스로 썩 만족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 유치한 효도마저도 할 수 없게된 것이다.
부모나, 아내, 아이들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나의 사랑, 나의 배려라는 게 늘 이 모양이다.
단세포의 아메바 같은---------
서둘러 인천공항을 빠져나오는데
평소 같으면 술병이 들려 있어야 할 왼 손이 너무나 허전했다.
아마도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나의 왼 손은 늘 허전할런지 모르겠다.
술병이 들려 있어야 할 그 왼 손이.
유치해도 아버지께 드릴
술 한 병 꼭 사고 싶었는데-------
아, 술 한병 !
살아오면서 술 한 병이 이렇게 절실한 적이 있었던가?
아, 그 술 한병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로 가는데
가슴 한 켠이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다.
부치지 못한 편지 4
공항에서 나오며 동생이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작은 이모가 받으셨는데 무조건 '빨리 오라'고 하셨다.
마음이 바빠졌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 그놈 참'
택시를 타고 동생이 행선지를 말했더니
기사는 잘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보바스 병원'이라고 동생이 말하는 순간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슬프고 심각해야할 상황에서
어설프게도 이상 시인투의 말장난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보바를 거꾸로 하면 바보, 게다가 '스'는 영어의 복수형 's'
'바보들의 병원'으로 우리는 가야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 'Bobath Memorial Hospital'이 정식 병원 이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속으로 이리 만지고 저리 뜯어보며
살아온 나의 삶.
어릴 적부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말 그대로 텅 빈 생각, 공상들로 이루어진 나의 삶, 시간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실 난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 이름도 모르고
무턱대고 동생만 의지해서 길을 따라나섰다.
그래도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정말 문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버지와의 이별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식으로 잘해드린 것 한 가지도 없는 내가
세상과 이별하시는 아버지께
배웅만은 아주 잘 하고 싶었다.
평소에는 공부를 안 하다가
벼락치기로 공부해서는 좋은 결과나 바라는 그런 심뽀다.
힘겹게 세상을 사시다가 고통 속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날 시간을 기다리며
마지막 남은 몇 번의 숨을 고르고 계실
아버지도 따지고 보면 바보가 아닌가.
죽 한 숟가락,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찾아오는 자식도 없이 외롭게 견디시는
아버지는 분명 바보가 맞을 것이다.
자식 셋 다 모두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명절 때면 외로우셨다는 아버지.
머나먼 이국 땅으로 살러가는 자식들의 소매를
아버지는 수십 번은 잡아 당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한 말씀도 없으셨던 아버지.
말씀이 없으셔서 더 외롭고 아프셨을 아버지.
그 때는 내 가야할 앞길이 바빠서
등 뒤에 남겨진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
아, 바보같은 세상의 아버지, 아버지들.
내가 아버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뒤에 남겨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고자식 때문에
세상의 부모들은 다 바보가 된다는 걸.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리고 나서야,
그리고 임종을 지키러가는 그제서야,
아버지 마음의 한 자락을 겨우 만질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바보들의 병원'에 계신 것은 당연했다.
공항을 떠난 택시가 긴 다리를 건널 때
등 뒷쪽으로 무심하게 해가 지고 있었다.
일몰.
해가 진 자리를 어둠이 차지하듯이
갑작스레 내 가슴 속으로 먹먹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아버지 생의 마지막 불도
꺼져가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떠실까.
외로우실까
두려우실까
아니면 고통 때문에 아무 느낌을 느낄 여력이 없으실까.
우리를 태운 택시는
반대편에서 거칠게 달려 오는 차량들의 불빛을 거슬러
빠른 속도로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부치지 못한 편지 5
병원은 성남인지 아니면 분당인가 (성남과 분당이 같은 곳?)하는 그 어딘가에 있었다.
미금역 (이 역 이름도 확실하지 않다)부근이라고 했는데 길을 지나며 보니 언덕 위에
흰 아크릴로 된 병원 간판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녁 일곱 시쯤 되었는데 벌써 어둠은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은 어김없이
빼곡이 채우고 있었다.
병원 입구의 데스크에서 아버지 계신 곳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라운지 같은 곳에서
어머니와 작은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외숙모가 우리를 반기셨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아버지가 운명을 달리하실까봐
속들을 끓이고 계셨음이 눈에 훤히 보였다.
우리를 만나자 자신들을 옥죄고 있던 책임의 사슬같은 것에서
풀려난 것처럼 자유로운 표정으로 바뀌셨다.
무거운 한숨 같은 것들을 폐부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려
조심스레 밖으로 토해들 내셨는데
아마도 살아오면서 가장 깊이 쉰 숨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숨들을 내려 놓으셨다.
황망히 인사를 마치고 보니 30년 넘게 뵙지 못했던
작은 이모부와 외숙모의 얼굴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긴 시간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다만 내 머리가 그 분들보다 더 셌을 뿐이었다.
어쩌면 작은 이모부의 머리는 그렇게도 까만지,
염색을 하셔서 그런 것인가-이 질문은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드리지 못했다.
머리색은 그렇다 치더라도 얼굴도 '전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하질 못했다.
대학교 이학년 때인가 작은 이모부 댁에서
이모부와 정종을 마신 적이 있었다.
잘 못마시는 술인데
"어, 제법 마시네"하시는 작은 이모부의 꾀임에 빠져
권하시는 잔을 마다 않고 홀짝홀짝 들이켰다.
그 당시 소주에 비해서 정종은 입 안에 훨씬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몇 잔 마시면 취해서 더 마시지 못하는 소주와는 달리
정종은 '나도 제법 술좀 한다'는 젊은 치기와 허세를 채워줄 정도로 부드러웠다.
마신 잔의 수를 셀 수 없을 정도까지 마셨다.
처음의 은근한 부드러움과 달리
서서히 오르는 취기는 질기고 오래 갔다.
집에 돌아가 자리에 누울 때까지 내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들었다.
육신을 가진 것이 그렇게 부담스럽다고 느낀 때가 그 때 말고 또 있었을까.
벗어버리고 싶은 육신
집에 돌아가는 길이 마냥 어둡고 길었던
젊은 날의 기억 한 조각이 눈 앞에 떠올랐다.
얼굴의 근심이 사라지면서 작은 이모부의 장난기 섞인
얼굴이 되살아났다.
작은 이모부와 한 잔 했던 기억은 있는데,
그런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시 한 잔할 기약은 없었다.
가수 양희은 식으로 표현한다면
살아가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다.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짧은 시간안에 스쳐지나갔다.
우리가 끌고 온 가방을 라운지 한 쪽에 밀어놓고
아버지를 뵈러갔다.
아버지는 라운지 바로 옆,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에 딸린 부속실에 계셨다.
원래 계시던 병실은 다섯 분이 함께 계시는데
상태가 위독하니 이 곳으로 옮기셨다고 했다.
아버지의 모습은 흡사 미이라 같았다.
올 이월말에 LA여동생 집에 가서 뵈었을 때만해도
좀 마르시긴했지만 그렇게까지 야위시진 않았다.
얼굴도 거의 알아봅 수가 없었다.
눈 밑엔 그림자처럼 붉은 빛과 갈색의 중간쯤되는 반점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마치 팬더 곰의 눈이 연상되었다.
동생은 아버지를 뵙는 순간 울컥하며 울음이 터지려는 것 같았다.
재빨리 동생의 어깨에 내 손을 올리며 감정을 억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가능하다면 아버지가 세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시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은, 그것이 얼마만한 시간이 될 지 몰라도
외롭지 않고 편한한 마음으로 함께 걷고 싶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해낸 아버지와의 이별법이었다.
몸은 고통스러우시더라도 마음만은 평화롭게 우리 곁을 떠나시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처음 뵈면서 내가 한 것은 아버지의 손을 잡는 일이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평소에도 아버지의 손을 잡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손을 잡는 일, 그것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행위다.
아버지와 아들, 세상의 누구보다도 가까워아 할
아버지의 손을 잡은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기억이 없다.
내가 아버지의 손이 필요할 때
아버지는 늘 먼 곳에 계셨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늘 떠돌이 삶을 사셨다.
인제, 양구, 대구, 원주, 월남, 그리고 예편하신 이후론 춘천에 머무셨다.
따로 산 것이 같은 집에서 함께 산 기간보다 훨씬 길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면 불편하고 어색한 손님 같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은 늘 너무 멀고 어색했다.
내가 군대를 다녀와서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오면서
이번엔 나의 손이 아버지의 손과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내 손을 필요로 하실 때
나의 손은 태평양을 건너 지구를 반 바퀴 돌아야 잡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살면서 멀기만 했던
아버지의 손과 아들의 손이
하필이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는 시간에야 만나다니
기막힌 삶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아버지의 한 쪽 손은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는데
다른 한 손은 체온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저희 알아보시겠어요?"
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조금 뜨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오른 쪽 눈에서 눈물 몇 방울을 흘리셨다.
두 눈이 아닌 한 눈에서만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
아버지는 말라가고 계신 것이었다.
물도 목으로 못 넘기시고 혈관으로 들어오는 액체에 의지해 삶을 이어오신 아버지.
양 쪽 팔뚝의 혈관 부근은 주사바늘 때문에 온통 멍이 들어 있었다.
멍이 든 아버지의 팔을 보며
푸른 색이 처절하게 슬픈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은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 몸 속에 남아 있는수분의 얼마를 소비한다는 말과 같은 것.
아버지가 흘리신 몇 방울의 눈물이 안타까웠다.
아버지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피폐한 육신에 비해 아버지의 의식은 또렷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몇 번인가
시간을 물어보셨다고 한다.
말씀을 하실 기력이 없으시니 손목을 가리키며 시간을 물어보셨을 게다.
그리고 기다리셨을 것이다.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다림.
대체 자식이 무어라고 고통을 참고 기다리신단 말인가.
자식인 내 마음은 그렇게 절실하지 않은데도.
작은 소화기 같은 통에서 가느다란 호스가 나와
아버지의 코에 연결되어 있었다.
산소호흡기였다.
아버지는 산소호흡기 덕으로 삶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사는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호흡의 할당량이 있다면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아끼고 아끼고 계셨을 것이다.
숨을 쉬는 것도 고통이 된다는 걸
아버지를 보며 깨달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마시고
내 쉬는
숨.
아버지는 가끔씩 무슨 말씀을 하려고
애를 쓰셨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어 번 글을 쓰는 시늉을 하셔서
종이와 펜을 가져다 드렸다.
글을 쓰신다고 쓰셨는데
두 세 살짜리 아이가 펜을 잠은 것 같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낙서가 되고 말았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이 순간엔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그토록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했던 말씀을 .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
가슴이 더 저리다.
그렇게 아버지의 지상에서 맞는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부치지 못 한 편지 6
시간이 흐르며 아버지의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1-2초 때론 3초 정도 숩을 멈추었다 몰아 쉬곤 하셨다.
숨을 쉬는 고통,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숨을 잘 쉬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군대에서 화생방 교육시 받았던 개스실의 체험을 떠올리며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내 숨을 나누어 드릴 수만 있다면--------
의사표시를 하실 수 있는 동안
나는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 드렸다.
다섯 아이들 모두 잘 자라서 모두 열심히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평소 건강하실 때에도
전화를 드릴 때마다 비슷한 레파토리가 반복되긴 하지만
아이들 소식은 아버지께 늘 새로운 활력소가 되는 것 같았다.
손자 손녀들의 이름을 손수 지으셨기에
아이들이 당신이 지은 이름에 걸맞게 사는 걸 보시면
특별히 즐거워 하셨다.
특별히 둘째 지영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또 다음 학기부터는 박사과정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
"거 봐라,' 지'영이는 학자가 될 거라고 하지 않았냐?"
하시며 즐거워 하시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특별히 막내 민기는 학교 성적도 시원찮은데
공부엔 전혀 관심도 없어서 걱정된다고 했더니
"다 제 길 찾아 갈 테니 걱정마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민기는 음악을 하기로 진로를 결정한 후로는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세계 최고라는 Juilliard의 Pre College과정도 마쳤다.
대학 진학을 미루고
해병대에 지원해서 힘든 훈련을 마친 후
현재는 미 해병대 사령부 군악대에서 바순을 연주하고 있는데
제법 군복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막내 손자 민기를 누구보다도 보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
정복 입은 사진을 한 장 보내라고 하셨는데
미루고 미루다 그 작은 소원 하나도 들어드리지 못했다.
해병 신병 훈련소에 같이 입소한 800여명 중에서
2등인가 3등으로 졸업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는
"내 뭐랬냐? 민기가 무얼 해도 할 거라로 하지 않았니?"
하면서 기뻐 하셨다.
특별히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막내 손자
민기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
한국말이 영 서툴어 어쩌다 할아버지와 통화할 때도
난감해하는 민기에게 아버지는 무언가 꽤 길게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두어 달 전쯤 아버지가 올 한 해는 넘기실 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는
나도 마음의 여유를 좀 가진 게 사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0월 첫 주말에 있을 예정이었던
큰아들 준기의 LSAT시험이 끝나면
두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 갈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는데
갑자기 위중한 상황을 맞아
모두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시간에게 감정이 있을 리 없지만
시간, 그 시간이라는 놈 앞에
'야속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았다.
9월인가 아직 아버지가 말씀을 하실 수 있을 때,
전화를 걸어 그 계획을 말씀드렸더니
고목에 푸른 새 잎이 돋는 것처럼
맥 없던 아버지의 목소리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던 걸 기억한다.
아마도 그 기억과 기대감으로 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좀 더 버티셨던 아닐까.
동생은 지난 여름 한국을 다녀왔다.
조카 하람이도 할아버지를 뵈었다.
동생은 그 때 찍었던 사진들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의 한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흘렀다.
아버지 남은 목숨 중 얼마가 눈물 몇 방울이되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듯했다.
동생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조카 하람이를 바꾼 뒤,
아버지 귀에 전화기를 대어 드렸다.
아버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어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마른 짚단에 바람이스치는 소리.
목소리에 물기가 없었다.
아마도 하람이는 또랑또랑하게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별 반응이 없으니 전화기를 놓고 그 자리를 떴을 것이다.
전혀 안녕하지 못한 할아버지에게
가장 어린 손녀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라는 한 마디가
작은 기쁨과 위로가 되었을까.
-그랬을 것 같다.
적어도 하람이 생각만으로 내게는 위로가 되었다.
맑고 또랑한, 그리고 장난기가 넘치는
하람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잠 한 숨 못잔 내 피로가 가시는 듯 했다.
하람이가 레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마른 아버지 입 안에 침이라도 고이게 하는 레몬 같은 존재,
하람이.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부치지 못한 편지 7
저녁 10시 쯤 되어서 광수가 자기 처와 같이 병원을 찾았다.
광수를 보며 세월은 나만 스쳐지나간 것 같은 억울함을 느끼곤 한다.
네 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세치 하나 없이 검고 숱많은 머리에다
얼굴엔 주름하나 보이질 않았다.
동안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고 청년의 모습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았다.
세월이, 시간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수와 그의 처 데레사(부모님은 광수의 처를 세례명으로 부르신다)는
찾아오는 자식 하나 없이
썰렁하게 명절을 보내시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우리 대신 자식 역할을 제대로 해주었다.
그러니 그 고마움으로 따지면
그렇게 싱싱한 청년의 모습을 한 광수를 마냥 부러워해서도 안 될 일이며
오히려 내 젊음을 얼마간 덜어내 그에게 준다해도
내가 손해보는 거래는 절대로 아닐 것이었다.
아버지를 뵈면서 말 없는 광수와는 달리
데레사는 여자라 그런가, 아니면 정이 많아서인가
아타까움과 슬픈 감정들을 말로 털어내었다.
광수 부부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좀 고통스러워하시기는 했지만
평온 모드였는데 갑작스레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데레사도 아버지가 그 병원에 오신 후
적어도 한 달 간은 아버지를 뵙지 못한 것 같았다.
변해도 너무나 변한 '고모부'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녀의 태도로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 '멋쟁이 고모부'가 그런 모습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멋쟁이 고모부가, 멋쟁이 고모부가------'하며
멋쟁이 고모부를 몇 번 반복하더니 말을 잊지 못했다.
그리곤 '멋쟁이 고모부' 손을 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작 어머니나 나, 그리고 동생은 덤덤한 편이었다.
아버지는 성품이며 태도, 옷차림 등이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하며 꼿꼿하셨다.
돌이켜 보니 수염이나 머리가 덥수룩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술을 많이 들고 집에 오셔도 술을 마신 '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군대에 계실 때에도 군복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손수 다려입으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곱게 빗어 넘긴 흰 머리까지도
데레사에겐 멋으로 비춰진 것 같았다.
데레사의 눈으로 보면
나는' 멋'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아무리 후하게 쳐주어도 아버지의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몇 번 동생과 여행을 다니며 동생이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는 걸 느꼈다.
동생이 걷는 모습을 보며 언뜻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체형이며 걷는 모습이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입었던 옷가지도 차곡차곡 아주 예쁘게 개어서 여행가방 안에 넣는 걸 보고
행동이며 성격까지도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입었던 옷은 대충 둘둘 말아 가방에 쑤셔 넣으면 되지
뭘 그리 시간과 공을 들인담.)
도대체 정리 정돈이 안 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뒤돌아 보며 (지금은 아내의 잔소리가 두려워 많이 향상되었음)
아버지가 참 많이 답답해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중에 이모부가 동생과 나를 불러내셨다.
광수부부가 병원에 오면서
김밥 몇 줄과 오뎅 국(요샌 어묵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내겐 오뎅이라는 말이 더 친근하다)을 사왔다.
아버지 곁을 지키는 동안 가끔씩
뱃속에서 신호가 오긴 했다.
그래도 무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오뎅국을 보니 갑자기 숨 죽이고 있던 허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실내가 추운 것도 아닌데 내 속이 허허로왔던 것이다.
오뎅국을 곁들여 김밥 한 줄을 뚝딱 해치웠다.
오뎅국과 김밥 한 줄이 주는 위로.
결코 화려하다고 할 수 없는 그 소박한 음식이
그날 밤 내게 가져다준 위로의 힘을 난 잊을 수가 없다.
그 위로의 원천은 사람이고
그 음식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지닌 사랑과 배려의 마음일 것이다.
작은 사랑이나 배려가 사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것.
'나는 그런 사람일까'
적어도 나는 아버지에게만은
그런 사람이질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사랑이 늘 모자라고 인색한 데다가
그 씀씀이라는 것도 우리 아이들이나 곁에 있는 아내에게
집중되고 있으니 아버지는 우선순위 저 밑에 있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되기 일쑤였다.
무심.
아버지께 작은 마음 하나 드리는 일조차
잘 하지 못하고 옆으로, 뒤로 미뤄두곤 했다.
그 빚이 얼마나 될까?
갑자기 머릿속으로 생각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 아버지에게 썼던 편지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썼으나
정작 부치지는 못했던 편지가.
아버지 의식이 더 가물거리기 전에
부치지 못했던 바로 그 편지를 내 목소리로 읽어드림으로써
아버지에게 느꼈던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보잘것 없긴 하지만 내 사랑을 직접 전할 수 있는 시간이
그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부 치 지 못 한 편 지'
부치지 못한 편지 8
한국에서 발행되는 월간 '참 소중한 당신'에 2년 동안 내 글을 실은 적이 있었다.
그 첫 번 째로 실었던 글이 다음의 '눈을 치우며'이다.
'참 소중한 당신' 2010년 1월호였다.
아버지께 드리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첫 글이었기에
기억력이라고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가 신기하게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내가 자식을 키우는 아비가 되어서야
전에는 내가 읽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 한 자락을
비로소 조금이나마 만질 수 있었다.
아버지께 느낀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사랑 같은 마음을
표현한 글이었지만
정작 아버지께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고 만 셈이었다.
게으름과 무심함으로 미루고 미루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맞게된 것이었다.
아. 나라는 존재.
나라는 자식.
불효란 이런 것이 아닐까.
마음이든 물질이든 그 무엇이건
표현해야 할 때 표현하지 못하고, 드려야할 때 드리지 못하는 것.
그래서 시간을 흘려버리는 일.
아버지의 숨은 점점 더 가빠지고 있었다.
눈을 치우며
어제 하루 하늘이 낮게 가라 앉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후 늦게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부터 내리던 눈은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 볼 때까지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바깥 세상은 그야말로 동화속 세상입니다. 그리고 평등하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이민 와서, 더군다나 시내에서 좀 떨어진 교외로 이사를 한 후로는 눈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제 직장이 있는 브루클린까지 50 Km 남짓 운전을 해서 출근을 하는 일이며,
한 없이 느려터진 차량들의 꼬리를 물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또 얼마나 더디고 지리하며 긴장되는지 모릅니다.
일터에서 출발할 때 듣기 시작한 노래 CD를 바꿀 여유도 없이,
운전대를 꼭 부여 잡고 같은 노래를 세 번씩이나 꼬박 들어야 할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집 drive way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무는 쌓이는 눈의 두께에 비례해서 더욱 더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마침 주일이기에 일터로 가야하는 부담이 없어서인지 오랜 만에 창 밖에 내리는 눈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제 생각은 날개를 달고 시간을 거슬러 이리 저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30여년 전, 우리집에 연탄 보일러가 있었는데 연탄을 갈고 연탄재를 치우는 등의 모든 일이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집 밖에 보일러가 있었기에 눈이 오거나 얼음이 꽁꽁 어는 날 새벽에
가스를 마셔가며 연탄을 갈고 재를 치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 내리는 창 너머의 풍경으로 비쳐집니다.
잔뜩 웅크린 모습입니다.
아버지 곁엔 아무도 없습니다.
차가운 겨울 날씨에 나는 아마도 따뜻한 구들장을 지고 한껏 게으름을 즐기고 있었을 테니까요.
나는 겨울 내내 집 안에서 추위를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음의 연유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런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당연히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셨습니다.
몇 해 전, 지금은 대학생이 된 큰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1월의 어느 주일 아침도 오늘처럼 그렇게 눈이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밤 새 내린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 중간까지는 족히 쌓여 있음직 했습니다
그 많은 눈을 치우기에는 내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겠다는 생각에 심적으로는 적잖은 부담이 되긴 했어도,
코 밑에 수염이 까뭇까뭇 자라기 시작한 큰 아들 때문에 제법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눈이 그치고 제설작업을 시작하려고 눈삽을 챙기며 아들을 찾으니,
아들은 옷을 다 챙겨 입고 모자에 장갑까지 낀 채로 어느새 눈삽까지 챙겨서 어깨에 메고 있었습니다.
총 대신에 눈삽을 멘 아들의 모습은 군장 검사를 마치고 출전 준비를 끝낸 군인처럼 늠름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빠를 도와 눈을 치우려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스럽던지요.
아들 키운 보람이 있다는 말은 꼭 이런 경우를 두고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운 좋은 생각은 잠깐이었고, 모든 흐뭇했던 감정들이 산산 조각나며 눈속으로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큰 아들 녀석은 친구들과 같이 다른 집 눈을 치우기로 약속이 다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휑하니 떠나가는 아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맥이 쭈욱 빠졌습니다.
그 넓은 driveway를 혼자 치워야 한다는, 가장의 비애라면 너무 신파조가 되는지 몰라도 하여간 비장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래 할 수 있어, 내 혼자 하고 말고-----“ 뭐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격려해가며 눈삽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30 여년 전 아버지는 새벽에 혼자 일어나셔서 매선 바람과 연탄가스를 마시며 연탄을 가셨습니다.
몸이 편찮으실 때에도 아무 말씀도 없이 마치 그 일이 자신의 운명이기나 한 것처럼, 아니면 신앙이나 되는 것처럼 그 일을 하셨습니다.
혼자 눈을 치우며, 아빠를 돌아보지도 않고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던 아들의 뒷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혼자 연탄불을 가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몸살로 몸이 불편하실 때, 이젠 지금의 제 아들 나이 또래였던 큰 아들이 대신 연탄불을 갈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왜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그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저는 연탄불 한 번 갈아본 일이 없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오고, 이민와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제 아들이 콧수염이 나기 시작한 그제서야 아버지 마음의 한 자락을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속옷은 물론 겉에 입은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을 쏟은 후에야 driveway가 훤해졌습니다.
점심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야 큰 아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눈을 치워서 번 돈 50불을 무슨 전리품이나 되는 것처럼 제 눈 앞에 자랑스럽게 펼쳐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마음과 내 마음의 거리를 채우기라도 하듯이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30년 쯤 뒤에 나의 마음과 큰 아들의 마음을 이어줄 흰 눈이 평등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 9
작은 이모부내외와 외숙모께서 광수 부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셨다.
전 날밤부터 꼬박 병원에서 지내셨으니 좀 쉬셔야 할 것이다.
그 분들도 다 칠십 중반을 넘어 팔십으로 가는 그 어디 쯤에
발을 디디고 계시니 육신이 얼마나 피곤하실까.
"먼 길 떠날 때, 가장 멀리까지 배웅나가는 것이 '가족'"이라고누가 말했던가.
가. 족.
부모를 떠나 서로의 체온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살아온 시간.
이승을 떠나시는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비로소 아버지를 찾았으니
나는 아버지의 가족이고 자식일까.
그 분들이 집으로 떠나시고 나니
병원은 더 어둡고 적막해진 것 같았다.
드디어 아버지와의 이별을 해야할 차례가 왔다.
열 시가 되자 아버지는 기도실이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환자들을 위해
방문객들이 기도를 할 수 있게 마련해둔 곳이리라.
방문객들이 다 돌아가고 난 후의 기도실은 어둡고 썰렁했다.
언뜻 보니 성경책과 찬송가들이 어지럽게 서가에 꽃혀 있었다.
긴 벤치가 몇.
그리고 앞 쪽 벽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원래 아버지의 입원실은 여러분이 함께 쓰시기에
가족들이 밤을 함께 지샐 수 있도록
병원측에서 배려를 해서 이 곳에 계시게 된 것이었다.
벤치를 방 가장자리고 치우고 아버지를 가운데 모셨다.
벤치는 쿠션이 있어서 하룻밤을 아버지 곁에서 지내기엔 안성 맞춤이었다.
그 곳에서 3년 동안이나 미루고 미루며
아버지에게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읽어드릴 셈이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간 노트북 컴퓨터는 배터리가 없어진 지 오래된 데다가
전원의 플러그마저 한국의 것과 맞질 않았다.
동생이 마침 전환용 플러그를 가지고 있어서
라운지에 전원을 연결하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컴퓨터가 켜지는 속도도 느릴 뿐 아니라
인터넷에 연결도 되질 않는 것이었다.
동생 말로는 컴퓨터가 오래 되어서 그러니
이참에 새로 하나를 장만하라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것인지.
급한 마음에 당직 간호사에게 부탁을 해서
병원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병원 컴퓨터도 그렇게 느릴 수가 없었다.
겨우 내 블러그에 접속해서 아버지에게 읽어드릴 글을 찾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도대체 눈에 띄질 않는 것이었다.
당황하면 가끔 의식이 블랙아웃이 된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의식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질질 끌 시간이 없었다.
글 찾기를 포기하고
하릴없이 기도실로 돌아갔다.
그냥 기억을 더듬어 편지 내용을 이야기로 해드릴 셈이었다.
언젠가 부모님과 함께 감곡 순례지 성당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 곳 순례지의 카페에 '참 소중한 당신'이 있었다.
그 당시 감곡 성당의 주임이셨던 김웅렬 신부님께서
당신이 먼저 읽으시고 카페에 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비치해두신 것이었다.
내 글이 실려 있는 잡지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일부러 내 글을 찾아 읽으시며
카페에서 일하시는 분께도 자랑을 하셨다.
그런 경험 때문에 혹시나 해서
정말로 혹시나 해서 기도실에 있는 서가를 살펴보았다.
서가엔 성경책과 찬송가가 무더기로 있었는데
한 구석에 한 뼘 쯤 되는 분량의
'참 소중한 당신'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바삐 뛰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간절하고 농축된 기도를 한 적이 있었던가.
'제발, 제발------'
기적처럼,
난 거기서 쉽사리 '참 소중한 당신' 2010년 1월호를 찾을 수 있었다.
내 첫 글이 실렸기에 아주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카톨릭 신자인 남자 탈렌트의 사진이 표지에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그렇게 찾길 원했던 글이 실려 있는 잡지가 틀림 없었다.
기적을 믿긴 하지만
나하고는 상관 없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간절히 원해서 일어난 작은 기적.
난 그것이 기적이라고 믿는다.
기적과 우연의 경계
우연처럼 일어난 일이라도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믿을 때
신앙은 시작되는 것이다.
내 이성과 논리 넘어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인정할 때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출발점은 겸손이다.
어젯밤부터 주무시지 못한 어머니를 옆 방에서 눈을 부치시게 하고
동생과 내가 아버지 곁에 남았다.
잡지에서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읽는 내내 목이 메었다.
동생이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울컥해서 잠시 멈추기를 몇 차례를 반복하고야
드디어 읽기를 마쳤다.
몇년을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임종을 앞둔 아버지께 내 목소리로 읽어드렸다.
이런 무심한 아들의 편지를 들으시고
아버지는 무어라고 하셨을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못하시고
숨소리만 점점 거칠어져 갔다.
동생에게는 벤치에 누워 눈을 부치라고 일렀다.
그리고 난 아버지 침대 곁에 앉았다.
이승을 떠나시는 아버지의 길벗이 되드리고 싶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까지 함께 할 작정이었다.
결국 그 날 밤이 일생을 통해
내가 눈을 뜨고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장 긴 시간이 되었다.
부치지 못한 편지 10
아버지의 숨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더 거칠어져 갔다.
호흡의 거칠기가
디크레센토는 없고 크레센토만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답답함과 불안함의 크기도 아버지의 숨소리에
비레해 커져만 갔다.
아버지의 마지막 숨은 언제일까.
숨이 멎고, 뛰는 심장도 멎고
그러면--------
아버지와는 영 이별인 것이다.
아버지는 숨을 들이마신 후 3,4초간 멈추었다가 내쉬는 일을 반복하셨다.
산소호흡기가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숨은 벌써 멎었을 것이다.
숨 쉬는 일도 고통이다.
숨 쉬는 일이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 모형을 빚고 거기에 숨을 불어 넣자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는 창세기의 내용은
숨이 사람의 육신을 떠나면 삶은 끝이 나고
육신은 흙과 같은 존재가 됨을 일깨워준다.
숨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숨이 떠난 육신.
병원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그날 밤만큼
삶이 별 것 아니라는 허무를 뼛속까지 절절히 느낀 적이 있었을까.
가끔씩 코를 고는 동생의 숨소리가 아프게 들렸다.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 슬픔 같은 것이
어둠 속에 먹물처럼 번졌다.
숨을 쉬기 위해 기를 쓰며 살아가는 육신의 슬픔은
아버지 뿐 아니라 아직은 젊다고 할 수 있는
동생의 숨소리에서도 묻어나와
방을 더 어둡고 침침하게 만들었다.
내 삷도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조금은 익었다.
벼는 익어가면서 고개를 숙인다.
앞이나 위로만 향하던 눈을
대지를 향해 낮춰 볼수 있게 되는 것이
죽음을 바로 옆에서 경험하며 배우는 교훈이다.
지고 있는 걸 내려놓는 일.
며칠 전까지도 거동도 못하시면서
스스로 양치질을 하셨다는 아버지.
평생 풀먹여 다린 바지의 주름처럼 꼿꼿하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도 육신의 병과 시간 앞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새벽 두 시 쯤에 간병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다.
아버지는 느끼고 계셨을까.
배설의 뒷처리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그 비참함을.
아니면 자존심마저도 다 맡기고 자유로우셨을까.
그렇게 무력해진 당신의 모습에서
비로소 해탈에 이르셨을까
모든 것 내려 놓으시고 훌훌 편하게 마지막 길을 가셨으면-------
풀이 빠진 옷은 구겨져도 부드럽고 후들후들 자유로우니까 말이다.
건강한 내 폐의 숨을 남은 시간만이라도
얼마간 아버지께 나누어드릴 수 있다면---------.
한 반 시간이 지나자 이 번에는 당직 간호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혈압을 재었다.
육십 몇이라고 했다.
우리가 처음 병원에 왔을 때가 팔십 언저리였으니까
아버지의 심장도 서서히 풀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팔십 이 년 동안 쉬지 않고 뛴 아버지의 심장도
마지막 박동을 얼마 남겨놓지 않았다.
혈압을 재는 일이
아버지의 삶이 언제 끝나는 지 예측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여겨졌다.
간호사는 아버지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진통제였을 것이다.
멍 투성이인 아버지의 팔.
검푸른 색이 주는 슬픔.
어둔 바다의 색.
저물녁 강가에서 바라보던 강물의 짙푸른 색.
언제고 늦가을, 저물녁 강가에 서면 눈물이 날 것 같다.
그 때는 목놓아 울 수 있을까.
짙푸른 삶의 아픔을 위해,
그리고 아픔도,
슬픔도 강물처럼 흘러가길 바라며
그렇게 강물을 닮은 울음을 울 수 있을까.
주사를 놓는 간호사의 손이
어둑한 전등 밑에서 희게 빛났다.
주사를 놓던 간호사와 기저귀를 바꾸던 아주머니의 손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내 손.
돌아가실 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아버지의 손을 쥔 것 밖엔
아무 것도 아버지를 위해 해드린 것이 없는 내 손.
어둠 속에 부끄러워 숨어 있던
내 손으로 다시 아버지 손을 쥐었다.
아버지 손이 서늘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 11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의 죽음은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의 거의 마지막 지점에 아버지는 도달하신 것 같았다.
결승점이 있는 운동장의 마지막 몇 바퀴를 남겨둔 마라톤 선수처럼
몸 속엔 남아 있는 힘이 없는 것 같았다.
머릿 속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하기야 나도 아버지가 위독하시단 소식을 접하고부터는
거의 눈을 부치지 못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병원 밖으로 나갔다.
꽤 넓은 광장이 있었다.
광장 한 바퀴를 돌면서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들여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내 쉬었다.
내 폐 안으로 들어온 바깥 공기는 몸 속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었던 잠을 몰아내었다.
잠들지 못한 도시의 불빛이 졸음에 겨워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병원도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고 몇 군데만 불이 켜져 있었다.
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군대시절 철책선 근무할 때 그랬다.
모두 잠든 어둠 속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슬펐다.
밤에 깨어 있는 존재의 고독.
아버지는 주무시는 걸까,
아니면 깨어서 고통 중에 처절한 고독을 맛보고 계신 걸까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별 몇이 희미하게 꾸벅이고 있었다.
'저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언제고 밤하늘의 별을 본다면 무슨 느낌이 들까?-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함께 별을 본 기억이 내겐 없었다.
밤하늘의 별,
별의 배경이 되는 깊은 어둠만큼이나 진한 슬픔이
별빛 대신 쏟아져 내릴까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가면
내 아이들과 하늘의 별을 함께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잘 아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자리의 별 중에서
내 별 하나를 삼고 아이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저 별이 아빠 별이야.'
아이들 중 누구라도 잠 들지 못하는 밤
홀로 깨어나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
내가 별이 되어 고독한 아이들 곁에 함께 있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그리움과 동시에 위로가 될 수 있는 그런 별.
-난 그런 별이 될 수 있을까-
서둘러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돌아갔다.
동생은 일어나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혼수상태는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전 날 밤 작은 이모부가 집으로 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이 생각났다.
"혼수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도 있으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둬."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기 전에
아버지 숨을 지탱해주는 산소호흡기를 뗄 것인지를 잘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아버지의 숨을 통제하는 것은 산소호흡기 뿐이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잠시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옛날의 효자들은 별 수단을 다 동원해서 부모의 삶을 연장하려는
혼신의 노력을 했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때론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고
죽음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려 기사회생했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현재에도 몇 십 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의식이 돌아온 환자의에 대한 신문잡지의 기사들이
어렴풋이 담배연기처럼 내 머릿속을 떠돌다 사라졌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가 믿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어떤 인위적인 죽음도 허락하질 않는다는
것이 가장 강하게 내 머리를 때렸다.
생명은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정작 아버지의 고통이 제일로 크겠지만
아버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고통도 아버지 고통에 못지 않은 것 같았다.
- 나는 신이 아니다 -
아버지의 생명을 바라보는 교회의 시선과
내 인간적인 시선의 충돌.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고통이 지속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해내야 하는 어머니,
나와 형제들의 고통.
내 삶의 패턴에 미칠 제약들과 병원비 같이
맞닥뜨려야 할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도
약삭빠르게 내 마음 속에 비집고 들어왔다.
"주님 아버지에게 불어넣으셨던 숨을 거두어 주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기도 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명의 영역을 침범한 내게 벌이 주어진다면
달게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만약에 아버지의 상태가 그렇게 지속된다면
의사에게 산소호흡기를 떼라는 요청을 하리라고 마음을 굳혔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당돌하게 맞서는 것 같아서 겁이 더럭 났다.
간접 살인을 하는 죄를 짓는 것 같아
결정의 순간 마음은 무간지옥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은 어떠실까'하고
아버지의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라면 누구도 자신 때문에
어려움과 고통을 받기를 원하시질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내 마음의 고통은 그 밤을 넘기지 않았다.
아버지도 빨리 자신을 거두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셨을까
아마 그러셨을 것이다.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하셨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아.버. 지
새벽 네 시 반인가
당직 간호사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혈압을 재었다.
혈압이 40대로 더 떨어져 있었다.
간호사가 나와 동생을 불렀다.
"혈압도 그렇고 숨을 입이 아니라 턱으로 쉬시는 게 보이시지요.
준비하세요,"
간호사는 하는님이 보내신 천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옆 방에 게시던 어머니를 불렀다.
모두 아버지 곁에 둘러 앉았다.
그 순간 하느님의 나라, 곧 천당은 꼭 있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세상을 마치며 아무 보상도 없다면
사는 일이 너무 아프고 쓸쓸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천국은 꼭 있어야 했다.
하다 못해 뉴옥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들에게도
기록에 상관 없이 메달이 주어지는데
여든 두 해를 끊임 없이 달리신 아버지에게도 무언가 보상이
저 세상에서 주어져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나는 천당과 지옥에 관한 교리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아버지께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시라고 말씀 드렸다.
우리 걱정은 하시지 말고
그 분이 부르시면 대답하시라고 했다.
혹시라도 우리에게 마음쓰시느라 그 분의 음성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숨을 거두 때까지도 청각은 살아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평생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사. 랑. 합. 니.다.'는 그 한 마디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긴 거리를 돌아 왔던가.
그 처음이 마지막이 되었다.
아버지의 숨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쉬셨다.
턱이 서너 차례 가볍게 떨리더니
그 길로 숨을 쉬시는 일도 끝이었다.
숨쉬는 고통에서 해방되셨다.
거미줄 같은 목숨줄이 끊어지신 것이다.
다시 이을 수도 없는 목숨.
이 지상에서는 아버지와 영영 이별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별의 슬픔보다도
아버지가 육신을 포함한 모든 짐을 벗으셨다는
안도감이 더 크게 내게 찾아왔다.
나도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내 쉬었다.
-우리 아버지 성격처럼 이별도 깔끔하게 하셨네.-
2012년 10워 3일 개천절 새벽 5시 25분.
아버지는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는 경계를 훌쩍 넘어가셨다.
아버지가 운명하신 날이 마침
개천절이었다,
낡은 육신은 벗어버리고 가벼워진 영혼은
열린 하늘문을 지나 하늘나라로 가셨을까.
"언젠가 다시 만날 땐 미루지 않고 '사랑한다' 말 할께요."
부치지 못한 편지 12
아버지가 숨을 거두신 후, 당직 간호사에게 먼저 그 사실을 알렸다.
간호사가 아버지의 혈압을 재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가지 절차를 거쳐 아버지의 사망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얼마를 기다려 종이 위에 사망 시간 같은 것을 적어
아버지 시신 위에 올려 놓았다.
아버지의 공식 사망 시간이 오전 5시 40분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간호사는 당직 의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와중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시고 얼마 지나서
공항에 도착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알아차리질 못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전에 병원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는지
먼저 택시를 잡아타고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전화기를 택시 기사에게 넘겨 병원 위치부터 확인시켰다.
다시 전화기를 받은 아내는 그제서야 내게 물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아내는 허탈함과 슬픔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 말이 필요 없었다.
"빨리 와."
빨리 오라고 해서 빨리 올 수 없음을 알지만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나나 어머니, 그리고 동생의 그것을 다 합친 양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아내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망연자실이란 말이 바로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근처에 오면 전화해."
그 말을 마친 후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여섯 시가 지나 당직의사가 와서 아버지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아마도 유족들에게 사망을 알리는 공식적인 형식이 있는 것 같았다.
간호사의 메모를 보고 사망 선고를 하는데
중간에 더듬더듬 하다가 다시 했다.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경험이 적은 젊은 의사.
얼마만한 시간이 흐르면 의사 '선생님' 하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때가 오는 것일까.
청년 장교 시절, '소대장'이란 호칭이 귀에 익숙해진 것이 언제 쯤이었을까?
내가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도
한동안 '선셍님'이란 호칭이 영 어색하고 쑥스러웠었지.
설익은 내가 '선생님'으로 불릴 때마다
미안했었다.
스무 해 넘게 선생님을 부르기만 하다가
내가 선생님으로 불릴 때의 그 쑥스럽고 부끄럽던 느낌.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어색하던 시절이 가장 순수하고 열정이 넘쳤었다.
그리고 마음과 태도도 가장 '선생님' 에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씩 호칭에 익숙해지면서
그 호칭에도,
삶에도 먼지가 쌓여가고-----
젊은 의사의 조금은 자신 없는 태도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까지 한 것을 보니
나도 제법 나이테가 늘은 것 같았다.
지금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가장 자연스럽다.
이십 년 넘게 세탁소를 하면서
때로 사람들이 '김 사장님'이라고 부를 때가 있는데
아직도 귀에 거슬린다.
'사장은 무슨 사장'이라는 조금은 자조의 앙금이 가슴 속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런 수식 없이
그냥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가장 편안하다.
그리고 잔잔한 행복도 내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다.
내가 나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 같아서 좋다.
누군가가 나를 호칭이 아니라
이를으로 부르는 사람에게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돠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병원 근처에 거의 다 왔어."
드디어 긴 시간, 긴 거리를 헤치고
아내가 왔다.
아내가 곁에 있으면 느껴지는 포만감.
이렇게 허허로울 때면 아내의 존재가 늘 그 빈 자리를 채워주곤 한다.
아내와 함께 서둘러 아버지에게로 갔다.
어내에게 아버지의 모습은 충격이었던 같았다.
아버지를 뵌 지 3-4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아주 딴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그도 그럴 것이었다.
더군다나 몇 달 동안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셨으니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를 떠나서 아버지의 모습 자체가
슬픔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병원에 있었던 어느 누구 보다도
아내는 슬퍼했고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내가 아내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이제 그만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영리한 아내는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당직 간호사가 시신을 씼고 옷을 갈아입혀야 하니
밖으로 나가달라고 요청을 했다.
병원 유니폼을 입은 두 여자 분이 그 일을 하기 위해
방으로 왔다.
아주머니 한 분과 아가씨라고 부를 수 있는 젊은 여자였다.
'아주머니는 생활을 위해서라 이런 일을 한다지만
저 젊은 여인은 왜 이런 일을 할까'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누구도 만지기 꺼려하는
시신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하는 그 손.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 지
당당하게 밝하기가 껄끄러울 것 같은
그 분들의 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 아닐까.
얼마가 지났을까.
다 끝났으니 방으로 들어오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으로 손을 본 까닭인지
아버지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옅은 하늘색 양복이 입혀져 있었고
얼굴에 화장기도 있는 것 같이 제법 살색이 돌았다.
한 달 넘게 계시던 병원을 나서
외출을 나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벗어버린 환자복.
환자복처럼 아버지를 덮고 있던 고통도 훌훌 벗어버리고
여행을 떠날 때가 온 것이었다.
하늘색 옷을 입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떠나는
하늘여행.
혼자 떠나시는 하늘로의 여행길이
쓸쓸하실까.
아니면
모든 것 털고 천국으로 가신다는 설레임으로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들떠 계실까.
어쨌거나 아버지는 이미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나
우리 곁을 떠나셨다.
개천절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부치지 못한 편지 13
LA에서 출발한 여동생은 그 때까지 병원에 도착하지 않았다.
누가 더 오실 분이 더 있냐고 간호사가 물었다.
여동생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해야할 절차를 계속 진행하라고 했다.
간호사는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기 위해 다시 분주해졌고
아버지의 시신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Garment Bag같은 것 속에 모셔졌다.
어머니는 장례를 담당하는 상조회에 연락을 하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면서
여기저기 묻고 알아보셔서 이미 돈까지 다 치르셨단다.
아버지 마음이 느껴져서
그제서야 마음이 저려왔다.
아버지 마음,
돌아가시면서도우리에게 짐을 지우기 싫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다니시는 능평성당에 전화를 해서
아버지의 선종사실을 알렸다.
우린 그냥 시키는대로 하면 되었다.
장례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일은
상조회에서 할 것이고
기도와 미사 등은 성당 연령회에서 다 준비해 줄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평생의 삶이
무척이나 깔끔하셨다는 게 드러나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나를 향했던 마음도 그러하였을 것이었다.
그때는 드러나지 않았어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내가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그런 마음.
집 앞에 자목련이 있는데
봄이면 어른의 주먹보다 큰 꽃송이들이
나뭇가지가 휠 정도로 풍성하게 피어난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는
아주 작은 눈들이 나뭇가지에 촘촘히 달려 있다.
겨울엔 아무리 목련나무이고, 눈이 달려 있다고는 해도
그냥 빈 가지일 뿐 볼 품이 없다.
자세히 마음을 써서 보질 않으면
딱히 눈길이 머물 곳이 없을 정도로 초라하기만 하다.
그런데 봄에 꽃을 피우면
그 풍성함과 탐스러움이 내 눈 안에 다 담을 수가 없을 정도다.
아버지 마음은 목련의 눈과 같으셨다.
그냥 스치기만 했지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눈길을 줄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내 마음은 늘 겨울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마음은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이렇게 눈이 벌어져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목련에 올 봄부터 이상이 생겼다.
꽃송이가 몇 개 달리지 않았다.
나무가 말라 죽어가는 것 같았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 봄, 목련이 제대롤 피어나려나.
꽃이 핀다 해도 꽃을 바로 볼 수 있을까.
아버지 마음, 목련꽃.
시신을 모시고 갈 앰불런스를 기다리는데
여동생이 병원에 도착했다.
여동생은 비행기에서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왔는지
비교적 담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앰불런스가 도착했다.
당직 간호사가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와
배웅을 했다.
병원 건물 외부까지 나와서 배웅을 하는 것을 보니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
병원에서 나올 때가 생각났다.
간호사가 아이를 안고
병원 밖에까지 나와서 아이를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혹시라도 병원 내부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 문제가 따르기에 그리 하는 것 같았다.
아무러면 어떤가,
배웅을 하는 간호사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가 병원에서 계시는 동안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으셨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마음이 흡족했다.
하룻 밤을 병원에서 지새며 보았던
그 당직 간호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일이 직업이긴 하지만
일을 일로서 하는 것과
마음을 써서 하는 것의 차이를 내가 왜 모르겠는가.
노안이 와서 육신의 눈은 비록 흐려지긴 했어도
마음의 눈으로 더 잘 볼 수 있음은
오로지 나이 들어감의 축복이다.
아버지의 자식을 생각하셨던 마음 씀씀이도
육신의 눈이 흐려진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하니 말이다.
'흰 옷을 입은 천사'라는 표현이 정말잘 어울리는 간호사는
실제로 엷은 핑크 빛 간호사 복을 입고 있었다.
그 핑크 색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사람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일에 영 둔감한 나이지만
넉넉했던 마음을 가진 간호사는내 가슴에
영원히 핑크빛 물을 들여놓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색으로 어떤 느낌으로 기억될까.
나에게 나의 색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마침 손님을 태우고 온 택시가 있어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여동생이 택시를 타고
능평성당으로 향했다.
나와 동생은 앰불런스에 탔다.
동생이 운전석 옆에 앉았고
내가 아버지 시신 곁에 앉았다.
시신을 운반하는 차라서 그런지 차의 히터를 켜지 않았다.
아무리 10월초라고는 하지만 아침 공기는 서늘했다.
갑자기 더운 국물 생각이 났다.
하기야 지난 저녁에 깁밥 한 줄로 때우고
하룻 밤을 꼬박 샜으니 시장기가 들만도 했다.
아 , 따뜻한 국 한 그릇이 그렇게 절실한 때가 있었던가.
앰불런스는 출근 시간임에도 막힘 없이
매끄럽게 달렸다.
한 삼십여 분 달렸을까, 막 시골티를 벗은 동넷길로 접어들었다.
직감적으로 능평성당에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좁은 길 양편으로 상점들과 음식점이 늘어서 있었는데
간판이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었다.
불란서 말로 된 안경점의 간판은
그 동네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어느 허름한 식당의 출입문에
'아침 식사됨'이라고
매직 펜으로 성의 없이 쓴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몸과 마음의 허기가 밀물처럼 몰려 왔다.
그 성의 없어 보이는 사인이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정다왔다.
1980년도 처음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배치 받았던곳이
보병 제 12사단 51연대였다.
원통에서도 툴툴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가야하는
천도리라는 시골에 연대 본부가 있었는데
나는 연대 직할 전투지원 중대에 배치를 받았다.
주위 환경이 척박해서인지
그곳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기본 태도가 툴툴거림이었다.
포장 안 된 자갈길과 낡은 시외버스가 꼭 그 곳 군인들을 닮았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말로 설명되는
척박하기만 한 그 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성의 없고 세련되지 못한
'아침 식사가 되'는 식당 덕이었다.
연대 본부가 있는 천도리엔 약 1KM 쯤되는 상가가 있었다.
대부분이 식당과 여관, 다방 같은 업소로 이루어져 있었고
뒷골목엔 간판이 없는 술집도 꽤 있어서
외출 외박 나오는 군인들에게
나름대로의 위로와 안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
집을 떠나 처음으로 맞은 천도리의 첫겨울은 맵도록 추웠다.
영하 20도는 기본으로 내려가는 추위를
내 혼자 연대 BOQ(독신장교 숙소)에서
군용 매트리스 두 장과 침낭 하나로 이를 부딪쳐 가며 견뎠다.
첫 월급이 6만원 쯤 되었던, 정말 쥐꼬리 같던 육군 소위 봉급,
거기에서 사단 경리 장교가 4만원을 떼어
강제로 적금을 들게 했다.
매달, 내 손에 2만원 가량 쥐어졌는데
장교 식당에 한 달 식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만원 쯤 되었다.
그러니 방을 얻을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대대로 간 동기들은 BOQ애서 잘들 지냈다.
난방이 되는 방에서 잠을 자고, BOQ 당번병이 해주는 밥을 먹고,
밤에는 동기들끼리 모여 고추장 푼 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셔댔다.
추위 걱정, 밥 걱정 없이 호강(?)을 했다.
그에 비해 내가 있는 연대 BOQ는 사정이 달랐다.
방안에 떠다 논 물은 겨우내 얼어 있었다.
난방시설은 되어 있었지만
난방에 필요한 기름은 공급되지 않았다.
-그 기름은 다 어디 갔는지?-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권한 같은 건 초짜 소위에게는 애당초 없었다.
고참 중위나 대위들도 어떨 수 없었으니까.
대개 고참 중위와 대위인 연대의 독신 장교들은
겨울이면 밖에 나가 방을 얻어 생활을 했다.
그들은 나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평일은 영내에서 숙식을 하니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일요일이었다.
갈 곳이,
갈 곳이 내겐 없었다.
머리까지 침낭 속에 집어넣고 잠을 잤다.
일어나기가 두려웠다.
얼굴을 침낭 밖으로 내미는 순간
방안의 물을 얼게하는 살기 등등한 추위와
마주하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밤새 내 체온으로 따뜻해진 침낭 곳을 포기하는 것은
또 얼마나 아깝고 안타까웠던지.
밤이 되어 다시 잠자리에 들 때는
얼음장 같은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결국 나를 침낭 밖으로 끌어내는 건 언제나 허기였다.
나도 그 때는 푸르기만한 20대였다.
추워도 배는 고파왔다.
추위와 허기를 달래준 것은 천도리에 있었던,
'아침 식사가 되는'허름한 밥집이었다.
'아침 식사됨'
그 사인은 내게는 구원과도 느껴졌다.
'허름함'이나 '세련되지 못함' - 이런 것들을 따질 수 없는,
그리고 따져서도 안 되는
어떤 고귀함과 절박함 같은 것이 그 곳에 있었다.
천도리의 그 밥집에 간판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뜨끈뜨끈한 콩나물국에 따뜻한 밥 한 그릇,
그리고 생선 한 토막과 달걀 후라이는
내 허기지고 추위에 언 몸과 맘을 녹여주었다.
'아침 식사 됨'이라는 사인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펄럭인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코너를 돌면서 사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순두부 5000원"
흰 광목 천에 빨간 글씨의 그 사인은
전혀 세련되지 않은 모습으로,
다른 메뉴들과 함께 바람에 6,70년대 왕대폿집의 그것처럼
무질서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상주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그 순두부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 시신을 싣고 달리는 앰불런스를 멈출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아범아, 순두부 한 그릇 먹고 가자."하고
나보다 앞서서
먼저 차를 세우고 앞장스셨을 것이다.
당신 곁에서 밤을 지샌 아들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셨을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누워 계셨다.
지난 2월,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 LA에 갔을 때
한국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나도 동생도, 아버지도 순두부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밥은 두어 숟가락만 뜨셨지만
아버지는 순두부 한 그릇을 천천히 다 비우셨다.
앰불런스에서 내려 뜨끈한 순두부 한 그릇 드시면
식은 몸에 다시 따뜻한 피가 돌 것 같았는데---------
마치도 군대 시절 겨울 아침에
'아침 식사가 되는' 허름한 식당에서 먹던
뜨거운 김치 콩나물국 처럼.
결국 LA에서 먹었던 순두부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순두부,
그 순두부 한 그릇.
이 지상에서는 말고
언제고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뵈면
꼭 함께 먹어야 할 것 같은
뜨거운 순두부.
어느새 앰불런스는 경사 급한
능평성당의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나의 글(내 마음에 드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향기(2012) (0) | 2018.07.16 |
---|---|
눈 쌓인 산길을 걸으며 (0) | 2018.07.15 |
나의 음악 이야기 - 행진 (0) | 2018.07.14 |
나의 음악 이야기 - Bach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0) | 2018.07.14 |
눈을 치우며 (0) | 2018.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