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로 내 나이 50세가 되었다. 흔히들 '쉰' 살이라고 말하는 50대가 된 것이다.
마흔 살이 넘으면 영어 표현으로는 over the hill이라는 말이 있는데 산 정상에 까지 오르고,
이젠 내리막 길이 내 앞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뜻 이리라..
내 나이 오십을 넘었으니 100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영락없이 꺾어진 인생이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도 있듯이 젊음이나 아름다움도
한 때 그 빛을 발하는 것이고 때가 되면 시들어버리는 게 삶의 이치일 터인데
어리고 젊은 시절엔 고개 너머의 모습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거니와
무엇 때문인지 어지럽고 분주하게 사느라 ....이렇게 오십 고개에까지 이르리라곤....
그저 막연하게 어림으로만 짚어보며 이제껏 달려왔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 이불 홋청을 꿰매시기 위해 바늘에 실을 꿰어달라고 부탁하실 때면
그까짓 것 하나 못하시는 할머니의 시력과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국어사전에 있는 글씨를 척척 읽을 수 있는
나의 지력과 시력을 비교하며 얼마나 우쭐대었던가.
그런데 내가 이제 그 나이가 된 것이다.
40대 중반부터 노안이 오긴 했지만 돋보기를 맞추어 놓고도 애써 맨 눈으로 나이먹음에 기를 쓰고 저항했는데
지난해 초부턴 웬만한 글씨는 그 위에 물방울이라도 번진 것 같이 어른어른할 뿐 도저히 글자 해독을 할 수가 없어졌다.
신문을 보면 정말 까만 건 글자고 하얀 건 종이라고 밖엔 할 수 없는 까막눈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느날 미사 독서대에서 독서를 하는데 글씨가 어른거려 정말 당혹스러웠다.
미리 여러 번 읽고 바지런히 연습을 한 덕에 그럭저럭 독서를 마칠 수는 있었으나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한창 유행하는 구구팔팔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신체적으로 내게 찾아오는 노화의 전조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가는 게 좀 허망하고 쓸쓸한 색조로 보이기도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또 다른 좋고 이름다운 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신은 하나의 문을 닫으시면서 앞에 새로운 문을 열어놓으시는 분이니까 말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고은 시인의 시 중에 ‘그 꽃’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단 세 줄의 짧은 시지만 아주 강한 인상으로 내 마음에 새겨졌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미국에 온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고,
그때 내 나이가 스물일곱이니 올해로 스물네 해째를 미국에서 살고 있다.
참으로 바쁘고 정신 없이 살았다.
아이들 다섯 자라나는 모습을 차분히 지켜볼 여유도 없이 점심도 서서 먹으며 바쁘게 살아온 날들----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한다는 책임 반 강박관념 반으로, 열심히 산 정상만 보며 오르다 보니
새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고 길섶에 핀 꽃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세월을 산 것이다.
그래서 작년 50세 생일에 결심을 했다.
쉰 밥덩이 같은 쉰 살이 아닌, 희년의 삶을 살기로 말이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50년 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해서 땅도 농사를 짓지 않고 쉬게 하고
노예들도 다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었다고 한다.
내 인생에 단 한번 찾아오는 희년을 정말 귀하고 기쁘게 살고 싶어서 결심을 했다.
가족들에게도 알렸고 아내와 아이들도 모두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종업원들의 임금도 적지만 올려주었다.
그리고 오후엔 학생 한 명을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키고 나는 오후엔 일찍 퇴근해서 여가를 즐기고 있다.
사진도 찍으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얼굴엔 생기가 돌고 잃었던 미소와 화색이 도니 식구들도 덩달아 행복해한다..
경제적으로 너무 빠듯해서 힘이 들긴 하지만 이런 행복을 돈과는 바꾸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범하지 않으리라.
언젠가 읽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기억난다. 어떤 사람이 물을 길어오는데 한쪽 물통은 줄줄 새는데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바보같이 그 일을 계속하더란다..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어째 그리 바보같이 물 새는 줄도 모르고 헛고생을 하냐고 그 사람에게 말을 했더니 그 사람은, “여보게들 저기 길 옆을 좀 보게나.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지 않나? 바로 그거야, 나는 봄 여름 내내 거기에 꽃씨를 뿌렸다네. 그러니 나는 물을 흘린 게 아니라 꽃 밭에 물을 준 거라네.”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지금까지는 꼭 움켜쥐고 살았다면 앞으로는 조금씩 그것들을 흘리면서 살아야겠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조금씩 물을 흘리면서 내가 가는 인생길에 꽃을 피우는 사람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도 꽃을 보며 행복해하겠지만,,
정작 꽃씨를 뿌리고 물을 준 사람만이 꽃 길을 걷는 내밀한 기쁨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낄 수 있으므로----
비록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긴 했지만
하느님께서 육신의 눈을 조금씩 닫으시면서 이렇게 마음의 눈은 크고 밝게 해 주시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지나쳤던 꽃들도 천천히 바라보며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이 땅에서 천국을 체험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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