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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 이야기

‪‎오래된사진‬

(아내의 페이스 북에서 옮겨옴 아내의 글)


.오늘

지금
오랫동안 열지않던 서랍을 정리하다
상자 하나씩에서 나온 두 장의 사진들
언제였나...
어디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그런데
이 양반은 사진찍는 사람은 안 보고
왜 나만...

열려진 장소에서조차
서로의 어깨와
서로의 등을 기대고...

한 장의 작은 사진 속에
담겨진
세상에서 가장 친한 두 사람

‪#‎오래된사진‬





또 하나



.


(다음은 나의 글)

 

위의 사진은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지막 사진은 기억이 난다.

1981 10 8 저녁 무렵이다.

10 8일이 일요일이었고 다음 10 9일은 한글날로 공휴일이었다.

아내는 나를 만나기 위해

동생을 거느리고 길을 왔다.

지금이야 별로 길이라고 수도 없지만

때는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홍천을 경유해서 원통까지 와야 했다.

기억으로 너덧 시간이 걸렸었다.

어디 포장이나 제대로 되어 있었어야 말이지,

울퉁불퉁한 자갈길에다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 만큼

구불구불 틀어지고 경사진 비탈길은 어떻고.

 

일요일 아침 여덟 ,

연대 본부 BOQ (독신 장교 관사) 전화가 왔다.

전화가 왔다고 알리러 당번 병이 원통 검문소란다.

전에도 후에도 BOQ에서 나를 찾는 전화는 번도 없었다.

게다가 원통 검문소라니----

 

하늘도, 공기도 상큼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오빠, 나야 경애."

 

전화 수화기에서 맑은 샘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같았다.

 

30 간격이었던가?

원통과 우리 연대 본부가 있던 천도리 사이를 오가는 버스를 하나라도 놓쳐서는 되었다.

눈곱을 떼는 마는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매무새를 챙길 여유도 없었다.

 

5 대기조의 출동속도로 준비를 마치고

연대 본부 정문으로 뛰었다.

버스 정류장이 천도리 어디엔가 있었지만

아무데서나 손을 흔들면 버스는 섰다.

할아버지 소변이 급하시면 버스는 섰다.

곳에선 그랬다.

바빠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버스는 느렸고,

시간도 느릿느릿 오고, 그렇게 가곤 했다.

길도 시간도 직선이 아니라 곡선처럼

그렇게 휘적휘적 여유롭게 이어지던 때였다.

 

투덜거리며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마음이 급했다.

다리가 움찔거렸다.

버스 안에서도 마음은 달렸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버스는 원통에 당도했다.

 

그녀를 보는 것은 환희였다.

동생과 함께였다.

나를 만나러 혼자 수는 없고 하니

연휴를 끼어서 동생들과 설악산에 가자 하고

계책을 같았다.

 

반가움은 '환희'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같다.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했는지는 거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우리가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신분으로 ''(증명서) 없이 위수 지역을 벗어날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억으로 원통에서 갈래 길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우리 연대 쪽인 천도리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북쪽 방향으로 계속 가면 38선과 민통선이 있는 방향이다.

 

하나는 서울 가는 방향으로

원통의 사단 본부 앞에 검문소가 있어서 이상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계령을 넘어 속초로 가는 길이 있었으나

한계령에 검문소가 있어서 이상 수가 없었다.

 

한계령 검문소에 이르기 전에 

백담사로 가는 길은

우리 사단의 52연대 관할이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백담사를 끼고 설악산 자락을 얼마간 올랐던 같다.

하늘은 맑았고 물은 짙은 녹색을 띄고 투명하게 흘렀다.

 

우리는 아내가 준비해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있게 먹었던 고기였다.

물론 '가장'이란 절대가치가 아닌 상대적인, 그리고 정서적으로 단어이다.

 

누구와, 언제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맛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둑어둑해 무렵 산에서 내려 왔다.

(위의 사진은 내려 오면서 찍은 것으로 기억 된다.)

그런데 딱히 곳이 없었다.

 

곳이 마땅치 않았다.

원통에는 변변한 여관 하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것이 우리 사단의 군종 신부님께서 계신 곳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방동 성당에서 보좌로 계신 적이 있어서

안면을 트고 지내던 신부님이다.(꼿꼿하기로 소문이 나신 )

 

가끔 만나면 

"원통에 나올 기회가 있으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도 된다."

하시던 말씀이 마침 생각 났다.

 

원통에 있는 사제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이 비어 있었다.

마침 주일이어서 부대 곳을 방문하시느라

바쁜 일정이 밤까지 이어지는 같았다.

 

우리는 다시 발길을 돌려 여인숙을 찾아서 거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방에서 여섯이서 혼숙(?) 했다.

그런 곳에서 아내와 동생들을 묵게  것은

아름답고 환희스러운 느낌과 함께

두고두고 가슴 속에 미안한 감정으로 남아 있다.

 

'허름한'이라는 수식어도 오히려 과분한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을 지내고

우리는 헤어졌다.

 

' 여름 밤의 ' 아니라

' 가을 밤의 ' 아직도 기억 속에서

때론 달콤하게,

때론 가슴 저리게 

다시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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